항목 ID | GC0270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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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鎭川郡 |
영어음역 | Jincheon-gun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집필자 | 예경희 |
[정의]
충청북도 북서부에 위치한 군.
[개설]
진천군은 차령산맥이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달리고 있어 산악이 많고 동북부는 광혜원면과 백곡면의 경계를 흐르는 미호천 지류들이 남류하여 비교적 넓은 진천평야를 이루고 있다.
[변천]
진천군은 충청북도 3시 10군 중의 하나로서 삼한시대에는 수지(首知) 또는 신지(新知)로, 고구려시대에는 금물노군(今勿奴郡)으로, 신라 관할 이후로는 만노군(萬弩郡)으로 칭했으며 신라 제35대 경덕왕 대[742~765]에는 흑양군(黑壤郡)으로, 그 후에는 황양군(黃壤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기에 이르러 강주(降州)라 한 후 다시 진주(鎭州)라 개칭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자사(刺使)를 두었다가 제7대 목종 때 이르러 이를 파하였으며 1005년(현종 9)에는 청주에 소속되었다. 1250년(고종 46)에는 권신 임연(林衍)의 고향이라 하여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되어 지의부군사(知義富郡使)를 두었다가 임연이 형벌을 받아 죽자 다시 진주(鎭州)로 강등되면서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 초기에는 상산(常山)이라 칭하다가 1413년(태종 13)에 비로소 진천(鎭川)이라 개칭하여 현감을 두었고 1505년(연산군 11)에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중종 초에 다시 충청도에 편입되어 진천현이라 하였고 만승, 이곡, 덕문, 산정, 초평, 교방, 백락, 남변, 서암, 행정, 백곡, 북변, 소답, 월촌, 방동 등의 15개 면을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진천현이 진천군으로 되었고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진천, 만승, 초평, 문백, 이월, 덕산, 백곡 등의 7개면으로 개편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 진천면이 진천읍으로 승격되어 진천군은 1읍 6개면이 되었다. 2000년 1월 1일에는 진천군 조례 제1676호에 의거하여 만승면이 광혜원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역사지리적인 배경]
1. 전략거점 지역
1) 원삼국시대
진천군에 분포하고 있는 유적과 유물 등에 의하면 진천 지역에는 신석기시대에 이미 미호천과 백곡천 유역을 중심으로 취락이 입지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후에도 문화의 단절이 없이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진천은 마한에 속한 지역으로서 마한 54개국 중 목지국(目支國)의 수도였던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덕산면 구산리 일대에서 대규모의 취락과 야철 단지 등의 유적 및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일대가 고대 진천 지역 문화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2) 삼국~통일신라시대
『대동지지(大同地誌)』의 충청도조에 의하면 충청도는 본래 마한 지역이었으나 전한 말엽[서기 20년 전후]에 이르러 백제와 신라가 분점 했으며 백제가 도읍을 웅진으로 옮긴 뒤 충주, 청풍, 단양, 괴산, 제천, 영춘, 연풍, 청주, 청안, 진천 등은 고구려가 취했으나 551년(양원왕 7)에 신라에 흡수되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는 타당성이 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진천군 지역에는 삼국~통일신라시대와 관련하여 각종 유물·유적을 비롯한 다양한 사료들이 산재하거나 전해지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우선 덕산면 산수리에는 백제요지 유적[사적 제325호]이 있으며 이월면 삼용리에는 백제토기 유적[사적 344호]이 있다.
또한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진천읍의 신정리 걸미산성, 행정리와 사석리 및 문봉리 등에 걸쳐 있는 문안산성, 진천읍 성석리와 덕산면 경계의 대모산성, 초평면 영구리의 두타산성, 문백면 옥성리의 파재산성[일명 옥성산성], 백곡면 갈월리의 갈월산성 등이 있고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연곡리 만뢰산의 만뢰산성, 진천읍 벽암리의 도당산성, 진천읍 상계리의 태령산성 등이 있는데 이들 산성들은 대부분이 비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그리고 진천읍 상계리와 백곡면 사송리 간에 위치하고 있는 태령산(胎靈山)[421m]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흥무왕 김유신 장군 태생지의 뒷산으로 산 정상에 장군의 태를 묻었다고 하여 명명되었다고 하며 산 아래에 길상사가 있어 길상산(吉祥山)이라고도 한다. 태령산의 길상사에는 김유신사(金庾信祠)가 있는데 신라 때에는 사우를 세우고 봄, 가을로 향촉을 내렸으며 925년(태조 8)에는 고을 관현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고도 한다.
다음으로 만노태수의 관저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담안밭에서 진천 방면으로 조금 올라가 오른 편 골짜기에 있는 벽암리의 도당산성은 당시 신라와 백제의 경계선으로서 후방 기지였으며 연곡리 비선골의 만뢰산성은 치소의 전방 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광혜원면 광혜원리의 화랑벌, 화랑궁터, 병무관터, 당고개 등은 삼국시대 화랑의 전초 기지로서 이들 지역에도 군사 취락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유물들과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외 진천군에는 신라시대에 건립된 진천읍 상계리의 백련암 터, 진천읍 지암리의 지장사 터 등의 절터가 남아 있는데 지장사지에는 지름 150㎝가 넘는 큰 맷돌이 있어 절이 웅대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초평면 용정리 산 7번지에 있는 지방 유형 문화재 91호인 태화4년명마애불상(太和四年銘磨崖佛像)은 830년(흥덕왕 5)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 고려시대
진천군은 원래 고구려의 땅으로 금물노군이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 때에 흑양군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고려에 들어와서 다시 진주(鎭州)로 개명되었다. 진천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군사상의 요지로서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는데 신라 말기~고려 초기에도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즉 한강 유역을 지나 진천-청주-보은 등을 거쳐 호남의 곡창 지대로 연결되는 길로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문백면 구곡리의 세금천에 세워진 진천 농다리[지방 유형 문화재 제28호]는 고려 고종 때 권신인 임연(林衍)이 세운 다리라고 전해졌으나 최근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이라고도 하는 설도 있다. 또한 그 옆에 석탄교가 있고 그 위치로 보아 청주의 낭비성[현재의 상당산성]에서 도당산성으로 통하는 길로 보인다는 이설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에 불교문화가 발달하였고 많은 불교 문화재가 조성되었다. 이중 두타산의 영수암(靈水庵)은 908년(고려 태조 원년)에 창건된 것으로 진천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며 조선 인조 때 벽암대사가 중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영수사의 괘불은 진천읍 상계리의 백련암에 있었던 것인데 폐사되면서 이곳 영수암으로 이전되었으며 1977년 12월 6일 지방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연곡리 비립동[일명 비선골]에는 고려 초에 건립된 연곡리 삼층석탑[보물 제404호]이 있는데 지금은 보탑사(寶塔寺)가 웅장하게 건립되어 있고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워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또한 진천읍의 신정리 사지, 덕산면의 산수리 사지, 진천읍의 교성리 사지, 진천읍 연곡리의 연곡 사지, 문백면의 옥성리 사지 등도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던 사찰들의 사지들이다.
4) 조선시대
엽돈치[葉屯峙][344m]는 백곡면 갈원리와 충청남도 천안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개로서 이곳은 삼국시대의 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역으로서 지금도 당시의 유지가 남아있다고 한다. 또한 엽돈치는 임진왜란 때 안성인 홍계남(洪季男)이 의병 수천 명을 모군하여 왜군을 격퇴하였다고 하는데 그 우측에 왜군과 접전할 때 축조한 성첩구지(城堞舊址)가 아직도 남아 있어 당시에도 요새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백곡면 양백리 배티마을에서 경기도 안성군 금광면 상중리로 넘어가는 곳에는 배티고개가 있다. 1728년(영조 4) 3월 15일 이인좌(李麟佐) 일당이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청주성을 함락하고 진천현을 점령하였다. 이때 순천군수를 역임한 이순곤(李順坤)은 80노구에 의병을 이끌고 배티에서 맞섰고 경기도 소사 지방까지 추격하여 역도를 분쇄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때 적이 패했다고 하여 패치(敗峙)라고 했던 것이 배치로 변하였다고 한다.
또한 봉화산(烽火山)[415m]과 문안산(文安山)[415m] 중간에는 있는 잣고개는 6·25사변 때의 주요 격전지의 하나로서 임시 수도인 대구 방어에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곳으로 이곳에서 많은 적을 섬멸하였다. 1961년 6월 25일 진천중학교에서 충혼 위령비를 세웠으며 1978년에는 이 잣고개에다 다시 6·25격전지 반공투사 위령비를 세웠다.
2. 십승지 명당
조선 말기의 감결(鑑訣)에서 한양 남쪽 1백리는 전쟁의 피비린내가 나고 한양에서 비교적 가까운 십승지(十勝地) 중에 진천과 목천 등은 일곱 번째 승지들로 설명되어 있다. 감결에서 말하는 십승지는 명당으로서 병화가 들어오지 못하고 흉년이 들지 아니하는 곳으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
한편 백곡면 배티 아래의 양백리(兩白里)라는 지명은 깨끗한 선비로 사는 곳이라고 하여 명명되었다고 한다. 백곡면 양백리 양곡계곡에는 상백과 청학동이라는 2개 부락이 있다. 고려 말 이성계가 개국하자 고려 충신들이 속세를 피해 이곳에 들어와서 외부 세상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살았다고 하며 정감록에 매혹되어 피난지를 찾던 사람들이 이 고장을 많이 찾아와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청주한씨, 충주지씨 등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양백리 배터는 양백리 동부계곡을 따라 차령산맥을 넘어 안성군 금광면 상중리로 가는 고갯길 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는 동안 서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산간의 중심지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서울에서 순교한 남인 양반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안성, 죽산을 거쳐 이곳 배티고개 아래의 지거머리, 참새곡, 명심이곡, 절곡, 정심이곡, 속곡, 대명곡, 모리, 배티, 삼석곡 등 12개 골짜기를 중심으로 은거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배티는 현재 천주교 성지로 지정되어 있다.
3. 사대부의 가거지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1690~1756) 그의 저서『택리지』에서 진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청주)북쪽의 진천은 청주에 비교하면 평야가 적고 산이 많으며 산과 골짜기가 중첩되었고 또 큰 내가 많다......토지는 몹시 비옥하다.”[충청도편].
"(면화) 오직 충주 근처와 괴산, 연풍, 청풍, 단양 등지에서는 더욱 많이 재배하나 차령 이남에 미치지 못한다. 황간, 영동, 옥천, 회덕, 공주가 제일 잘 되고 다음으로 잘 되는 곳이 충주, 문의, 연기, 진천 등의 여러 고을이다.”[생리편].
그런데 진천군은 차령산맥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어 북서부와 서남부는 산지이고 북동부와 남동부는 대부분이 구릉성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중앙부에는 넓은 진천분지가 자리를 잡고 있다. 또한 비교적 큰 하천인 백곡천과 칠장천, 회죽천, 한천천, 백곡천 등의 미호천 지류들이 흐르고 있는데 이중환은 이곳의 진천평야가 매우 비옥하고 면화도 잘 자란다고 언급하고 있다.
사실 진천은 삼국시대 이래 전략적 거점지역으로 감결에서 십승지의 하나로 언급될 정도로 지리가 매우 좋은데다 토지 또한 비옥함으로 생리가 좋았으며 청풍명월의 인심과 함께 산수가 잘 어우러진 경승지가 많아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이 거주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진천군 관내에 고택, 정자, 사당, 정문, 묘소, 비석 등의 유교 문화의 유산이 매우 많다는 사실이 충분히 뒷받침 해주고 있다.
[면적과 인구]
진천군의 면적은 총 406.00㎢이며 이는 충청북도 전체 면적의 5.5% 정도에 해당된다. 이중 임야 면적이 232.93㎢, 밭이 38.52㎢, 논이 65㎢, 기타 면적이 69.55㎢ 등을 각각 차지하고 있으며 농경지의 경우 밭보다는 논의 비율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8년 1월 현재 진천군의 총 인구는 60,152명이며 이중 진천읍이 26,117명(43.3%), 광혜원면이 9,595명(15.9%), 이월면이 7,996명(13.3%), 덕산면이 6,337명(10.5%)을 각각 차지하고 있어 이들 지역의 인구가 군 전체 인구의 83.1%를 차지하고 있다.
1970년 이후의 인구 변화 추이를 보면 우선 1970년~1990년에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의 도시화에 따라 나타난 농촌 인구의 유출과 같은 일반적인 현상과 일치되고 있다. 다만 진천군의 경우 수도권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1980년대 중반부터 농공단지의 조성으로 그나마도 인구 유출이 상당히 억제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2000년의 경우 1990년에 비해 인구가 크게 증가했으며 특히 진천읍, 광혜원면 등지의 인구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2008년은 2000년과 비슷하여 전반적으로는 정체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광혜원면의 경우 약 1,000명 이상으로 인구가 크게 증가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광혜원면에 공단이 조성됨으로써 인구가 크게 유입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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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 읍면별의 연도별 인구수의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