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5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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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延日鄭氏 |
이칭/별칭 | 영일정씨,오천정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진천읍 지암리|백곡면 사송리 |
집필자 | 강민식 |
세거지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진천군 백곡면 사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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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백곡면 사송리 |
입향시기/연도 | 조선 후기 |
성씨시조 | 지백호 |
[정의]
지백호를 시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 성씨.
[개설]
연일정씨(延日鄭氏)는 영일정씨(迎日鄭氏) 혹은 오천정씨(烏川鄭氏)라고도 한다. 영일은 경상북도 포항시의 동해안 일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고려 초에는 연일이라 불렸다. 지금은 각각 포항시 연일읍과 오천읍이며, 본관을 각각 연일·영일·오천으로 쓰고 있다. 2000년 현재 연일정씨 21만 6,510명, 영일정씨 1만 263명, 오천정씨 3만 650명으로 모두 합치면 34만 7,423명에 이른다.
[연원]
연일정씨는 사로 6촌 중 취산(嘴山) 진지부(珍支部) 촌장 지백호(智伯虎)가 32년(유리왕 9)에 왕으로부터 다른 5촌장과 함께 성을 하사받을 때 본피부(本彼府)로 개칭하고 정씨로 사성(賜姓)되었다. 연일정씨는 후손 정의경(鄭宜卿)이 영일호장(迎日戶長)을 지낸 후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본관을 영일로 하였으나, 후에 파가 나뉘었다.
고려 의종 때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받드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감무를 지낸 정극유(鄭克儒)를 1세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 고려현종때 동비원부사를 지낸 정자피(鄭子皮)를 1세조로 하는 양숙공파(良肅公派)로 갈라졌다.
지주사공파에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대표적이다. 감무공파의 시조는 정종은(鄭宗殷)이나, 세대가 실전(失傳)되어 정극유를 1세조로 하여 세대를 잇고 있으며,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유명하다. 역대 지리지에 송강 정철과 정종명의 묘소가 보이고, 정철의 6세손 정도(鄭棹), 7세손 정창환(鄭昌煥)은 효행으로 판서에 증직되었다. 『상산지(常山誌)』를 편찬한 정재경(鄭在褧)은 정철의 8세손이다.
[입향경위]
연일정씨와 진천군의 인연은 정철의 손자 문절공(文節公) 정양(鄭瀁)[1600~1668]이 1658년(효종 9) 진천현감으로 부임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정양은 강릉부사 정종명(鄭宗溟)의 아들로, 1618년(광해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1668년(현종 9)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송강 정철의 묘소는 1665년(현종 6) 송시열(宋時烈)이 터를 마련하고 손자 정포(鄭浦)가 일을 주도하면서 경기도 고양에서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로 이장하였다. 이때를 전후한 시기부터 연일정씨가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를 중심으로 세거(世居)한 것으로 보인다.
[현황]
200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진천군 관내에 거주하는 연일정씨는 184가구 566명으로 나타났다. 진천군 백곡면 사송리 사송마을 30여 호에 연일정씨와 중화양씨(中和楊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관련유적]
연일정씨와 관련된 대표적인 유적으로 진천 정송강사(鄭松江祠)가 있다. 1665년 정철의 묘소를 이장하면서 함께 세운 것으로, 지금의 건물은 1979년부터 중건한 것이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었다. 진천 정송강사 입구에는 진천 정철 신도비가 있고, 서쪽 능선 위에는 묘소가 있다. 신도비와 묘소는 이장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각각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와 충청북도 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