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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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以性 |
영어공식명칭 | Seong I-seong |
이칭/별칭 | 여습(汝習),계서(溪西),관서활불(關西活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95년 - 성이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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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6년 - 성이성 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성이성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성이성 승문원부정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성이성 경상도관찰사 심연의 참모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637년 - 성이성 경상도진휼어사 및 호서암행어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39년 - 성이성 합천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45년 - 성이성 서장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48년 - 성이성 담양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53년 - 성이성 창원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57년 - 성이성 군기시정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57년 - 성이성 진주목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59년 - 성이성 국장도감도청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60년 - 성이성 강계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61년 - 성이성 단양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661년 - 성이성 해배 및 낙향 |
몰년 시기/일시 | 1664년 - 성이성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95년 - 성이성 청백리 녹선 |
추모 시기/일시 | 1748년 - 성이성 부제학 증직 |
추모 시기/일시 | 1786년 - 성이성 오천서원 제향 |
출생지 | 성이성 출생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
거주|이주지 | 성이성 이주지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
외가|처가 | 성이성 외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
부임|활동지 | 성이성 부임지 - 경상남도 합천군 |
부임|활동지 | 성이성 부임지 - 전라남도 담양군 |
부임|활동지 | 성이성 부임지 - 경상남도 창원시 |
부임|활동지 | 성이성 부임지 - 경상남도 진주시 |
부임|활동지 | 성이성 부임지 - 평안북도 강계군 |
묘소|단소 | 성이성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
사당|배향지 | 오천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창녕(昌寧) |
대표 관직 | 강계부사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성이성(成以性)[1595~1664]은 문과 급제 후 강계부사 등을 지냈으며, 판소리 「춘향가」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가계]
성이성의 자는 여습(汝習), 호는 계서(溪西),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성이성의 아버지는 성안의(成安義)[1561~1629]로 승정원우부승지를 지냈다. 어머니는 호조참판 김계선(金繼善)의 딸 예안[선성]김씨로 경상도관찰사 김륵(金玏)[1540~1616]의 종손녀가 된다. 부인은 여주목사 금개(琴愷)[1562~1629]의 딸 봉화금씨(奉化琴氏)이며, 처할아버지는 봉화현감을 지냈던 금난수(琴蘭秀)[1530~1604]이다.
[활동 사항]
성이성은 1595년(선조 28)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문단리[지금의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에서 출생하였다. 1607년(선조 40) 아버지 성안의가 남원부사로 내려가는 길에 동행하였으며, 정경세(鄭經世)[1563~1633]를 방문하였다. 전주의 강복성(康復誠)[1550~1634]에게 학문을 배웠다.
성이성은 1616년(광해군 8)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성안의와 함께 공주로 어가를 호종하였고,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27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올랐다. 1631년(인조 9) 승정원주서·세자시강원설서, 1632년 세자시강원사서가 되었다. 1634년 병조좌랑 겸 춘추가 되었다가, 곧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이때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1580~1619] 추숭에 반대하다가 체직되었다.
성이성은 1635년 사헌부지평·홍문관부교리·사간원정언·세자시강원문학을 역임하였다. 1636년 홍문관수찬·부교리가 되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상도관찰사 심연(沈演)[1587~1646]의 참모로 활동하였다. 1637년(인조 15) 2월 경상도진휼어사가 되었으며, 7월에는 호서암행어사로 나아갔다. 9월에는 상소하여 윤방(尹昉)[1563~1640]·김류(金瑬)[1571~1648]·심기원(沈器遠)[?~1644]·김자점(金自點)[1588~1651]의 오국불충(誤國不忠)에 대한 죄를 논하였다. 이후 성균관직강·홍문관수찬·사간원사간·사헌부집의·병조정랑 등을 거쳐 1639년 12월 합천군수로 부임하였다.
성이성은 1645년(인조 23) 서장관이 되어 북경에 다녀왔다. 당시 돌아오는 행장(行裝)에는 침구 한 벌뿐이어서, 이를 본 부사 정세규(鄭世規)[1583~1661]가 매우 공경했다고 한다. 1647년 5월 담양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치적이 있어 1650년(효종 1)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650년에 집의가 되어 내직에 돌아왔다. 그러나 1651년 춘추관편수관을 겸직하면서, 경연 내용을 누설한 가주서 이명익(李溟翼)[1617~1687]을 옹호하다가 효종의 진노를 사서 사직하였다. 1653년 3월 창원부사로 복직하였다. 1657년(효종 8) 1월 군기시정에 제수되었고, 2월에는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어사 민정중(閔鼎重)[1628~1692]이 선치(善治)를 보고하여 표리를 하사받았다. 1658년 교리가 되어 내직으로 복귀하였다. 1659년 5월 국장도감 도청이 되었다가 10월 장례가 끝나자 체직되어 낙향하였다.
성이성은 1660년(현종 1) 4월 강계부사로 부임하였는데, 백성들의 삼세(蔘稅)를 면제해주었기에 ‘관서활불(關西活佛)’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만포첨사 한휴(韓休)의 무고로 1661년 단양으로 유배되었다가, 1661년 11월 사면되었다. 이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와 계서초당(溪西草堂)[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서 소요하였다.
[학문과 저술]
성이성의 유고로 『계서일고(溪西逸稿)』가 전한다. 『계서일고』에는 지제교로 있으면서 임금을 대신하여 지은 교서(敎書)·사제문(賜祭文)을 비롯해 상소문과 계사(啓辭), 중국 기행문인 연행일기, 암행어사 기록인 『호남암행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묘소]
성이성의 묘소는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성이성은 1695년(숙종 21)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1748년(영조 24) 부제학에 증직되었다. 1786년(정조 10)에는 영주 오천서원(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행장은 손녀사위 권두인(權斗寅)[1643~1719]이 썼으며, 묘갈명은 오광운(吳光運)[1689~1745], 묘지명은 다섯째 아들 참봉 성문하(成文夏)[1638~1726]가 각각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