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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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寧睦 |
영어공식명칭 | Gwon Yeong-mok |
이칭/별칭 | 경집(敬緝),동도(東島),배량(裵梁),왕자명(王子明),옥동보(玉東甫),왕동도(王東島)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84년 - 권영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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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2년 - 권영목 대구공립농림학교 제1회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권영목 영주공립보통학교 교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 권영목 대동상점 설립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8년 - 대동상점사건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권영목 대독립당촉성회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권영목 민족유일당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35년 - 권영목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7년 - 권영목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권영목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161 |
거주|이주지 | 권영목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161 |
학교|수학지 | 대구공립농림학교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대동상점 - 경상북도 영주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권영목(權寧睦)[1884~1935]은 1915년 대한광복회의 상업 조직인 영주 대동상점(大同商店)을 설립하여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상하이[上海]와 베이징[北京] 등지를 전전하며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권영목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집(敬緝), 호는 동도(東島)이다. 이명으로 배량(裵梁)·왕자명(王子明)·옥동보(玉東甫)·왕동도(王東島) 등을 사용하였다. 1884년 3월 19일 지금의 영주시 영주동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권영목은 이병호(李炳鎬)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912년 3월 대구공립농림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영주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5년 9월 11일 박제선(朴齊璿)[1878~1938]·이교덕(李敎悳)[1895~1955]·정응봉(鄭應鳳)[1895~1947]·류명수(柳明秀)[1893~1926] 등 교원 및 부호들과 함께 영주시장에 잡화상 대동상점을 설립하였다. 대동상점은 대한광복회가 만주지방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개설한 전국 100곳의 상업 조직 중 하나였다.
영주 지역의 부호 자제였던 권영목과 이교덕은 스승인 풍기공립보통학교 훈도 박제선, 풍기에서 서당을 운영하고 있던 정응봉, 봉화공립보통학교 훈도 류명수 등과 함께 대동상점 설립에 참여하였다. 이때 권영목은 토지 80두락, 류명수는 토지 70두락을 대여하는 형식으로 투자하였다. 대동상점은 표면상으로는 권영목이 경영을 맡았으나 상업보다는 독립운동에 전념하였고, 실제로는 박제선과 이교덕이 경영을 주재하였다.
권영목은 1917년 8월부터 박제선·김노경(金魯卿)·이교덕·류명수 등과 함께 만주 이주를 준비하였다. 1917년 8월 박제선이 이주지 선정을 위해 만주지방을 시찰한 뒤, 1918년 3월경부터 만주 봉천(奉天)으로 이거할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울의 매동공립보통학교 훈도 김노경이 참여하였다. 1917년 12월 26일 서울 남문여관에서 대한광복회의 총사령 박상진(朴尙鎭)[1884~1921]을 비롯한 박제선·이교덕·김노경·류명수·조재하 등과 협의한 결과, 자신이 직접 만주로 가서 장래 있을 만주 이주를 준비하기로 하고, 길림독군(吉林督軍) 맹사원(孟思遠)의 허락을 얻어 군사교육을 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한 자금은 대동상점을 처분하여 활용하기로 하였다.
권영목은 대동상점을 폐쇄하라는 박제선의 명을 받고 이교덕·류명수와 함께 영주군으로 귀향하였다. 그리고 대동상점 금고에 보관되어 있던 현금 700원과 권상수·송주찬 등이 지방의 자산가들에게 모금한 1만여 원을 마련하였다. 1918년 박상진 등과 협의 후 만주로 파견되어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대동상점의 구성원들은 영주헌병분견소에 체포되었고, 이른바 대동상점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1918년 3월경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사기횡령」으로 기소되어 1918년 5월 3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궐석 재판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후 권영목은 상하이와 베이징 등지를 전전하며 활동하였다. 1925년 말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촉성회의 회원으로 1927년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였다. 1935년 5월 10일 중국 봉천(奉天)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권영목은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