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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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敎悳 |
영어공식명칭 | Lee Gyo-deok |
이칭/별칭 | 인겸(仁兼),동강(東岡),이춘경(李春景)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 이교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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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5년 - 이교덕 대동상점 경영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이교덕 국민대표회의 군정서 대표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 이교덕 사회주의 관련 문건 인쇄로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이교덕 서대문형무소 투옥 |
몰년 시기/일시 | 1955년 - 이교덕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 이교덕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이교덕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상망동 840 |
거주|이주지 | 이교덕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상망동 840 |
학교|수학지 | 영주공립보통학교 - 경상북도 영주시 |
활동지 | 이교덕 활동지 - 중국 상하이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교덕(李敎悳)[1895~1955]은 1915년 대한광복회가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위해 개설한 영주 대동상점을 경영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등 여러 단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이교덕의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인겸(仁兼), 호는 동강(東岡), 이명은 이춘경(李春景)이다. 아버지는 혜민원주사를 지낸 이성희(李聖熙)로 1895년 6월 21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상망동에서 출생하였다. 영주 지역의 대부호였던 부친 이성희는 경술국치 이후 태백산에서 은거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으며,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귀국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동하였다. 형 이교인(李敎仁)은 1919년 3월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에 관여하기도 했다.
[활동 사항]
이교덕은 영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15년 9월 11일 박제선(朴齊璿)[1878~1938]·권영목(權寧睦)[1884~1935]·정응봉(鄭應鳳)[1895~1947]·류명수(柳明秀)[1893~1926] 등 교원 및 부호들과 함께 영주시장에 잡화상 대동상점을 설립하였다. 대동상점은 대한광복회가 만주 지역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개설한 전국 100곳의 상업 조직 중 하나이다. 이교덕은 스승인 풍기공립보통학교 훈도 박제선, 풍기에서 서당을 운영하고 있던 정응봉, 영주 지역의 부호 자제였던 권영목, 봉화공립보통학교 훈도 류명수 등과 함께 대동상점 설립에 참여하였는데, 대동상점의 설립 자본금 대부분을 출자하였다.
이교덕은 1917년 8월부터 박제선·김노경(金魯卿)·권영목·류명수 등과 함께 만주 이주를 준비하였다. 1917년 8월 박제선이 이주지 선정을 위해 만주지방을 시찰한 뒤, 1918년 3월경부터 만주 봉천(奉天)으로 이거 할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울의 매동공립보통학교 훈도 김노경이 참여하였다. 1917년 12월 26일 서울 남문여관에서 대한광복회의 총사령 박상진(朴尙鎭)[1884~1921]을 비롯한 박제선·권영목·김노경·류명수·조재하 등이 협의한 결과, 권영목을 만주로 보내 장래 있을 만주 이주를 준비시키고, 길림독군(吉林督軍) 맹사원(孟思遠)의 허락을 얻어 군사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자금은 대동상점을 처분하여 활용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빨리 대동상점을 폐쇄하라는 박제선의 명을 받고 영주로 귀향하였다. 그리고 권영목·류명수 등에게 대동상점 금고에 보관되어 있던 현금 700원을 제공하였다. 1918년 3월 권영목이 체포되면서 관련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른바 대동상점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1918년 3월경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사기횡령으로 기소되어 1918년 5월 3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징역 4월을 받았다. 이에 공소하여 1918년 6월 17일 무죄로 석방되기까지 3개월가량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4년 1월 18일 중국 베이징 동서공우(東西公寓)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군정서 대표로 정인교(鄭仁敎)와 함께 참가한 이중호(李重浩) 외 2명과 같이 머물던 중, 중국 관헌에 의해 「국민대표회의 선포문」과 국민대표회의 창조파 선언서 약 200책, 동지들 간 왕복 문서 등을 압수당하고 체포되어 취조를 받고 이튿날 석방되었다. 1929년 4월부터 상하이 고려공산당 간부 최창식(崔昌植)[1892~1957]이 경영하는 상하이의 삼일인쇄소에서 주정모(朱正矛)[일명 김경선(金慶先)]·조태희(趙泰羲) 등과 함께 사회주의 관련 문건을 인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0년 4월 28일 프랑스 조계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930년 5월 21일 서울로 압송되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55년 2월 13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교덕은 2008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