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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702
한자 寺刹
영어음역 Sachal
영어의미역 Buddhist Temple
이칭/별칭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집필자 정연학

[정의]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부처를 숭상하고 불법을 익히는 장소.

[변천]

우리나라 불교는 중국을 거쳐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의 순으로 수용되었는데,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 전진의 아도와 순도가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들어와 불법을 전한 것이 시초이다.

당시의 용인 지역은 백제의 영역이었는데, 백제는 384년(침류왕 1)에 동진(東晋)에서 온 호승(胡僧) 마라난타로부터 불교를 수용하게 되었고, 이듬해 한산(漢山)에 절을 지어 승려를 거처케 하였는데, 이때 용인 지역에도 불교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백제시대에 용인 지역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또한 백제시대의 절터 역시 아직까지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현존하는 사찰 가운데 문헌을 통해 알려진 가장 오래된 사찰은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백련사(白蓮寺)이다. 이어서 처인구 이동읍 묵리용덕사(龍德寺)가 세워졌는데, 그 밖에는 절터나 불탑, 불상 등의 자취를 통해 가늠해 볼 뿐이다.

처인구 백암면 박곡리(朴谷里) 절터는 신라시대의 절터로 전해지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용인 지역 곳곳에서 절터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용인 지역의 불교가 이때쯤 일반화되었음을 알려준다. 이 시대의 유적을 보면 처인구 원삼면 목신리의 석조여래입상과 이동읍 어비리 동도사(東度寺)의 불상과 석탑 등이 있다.

고려시대의 불교 유적은 많이 나타나는데, 고려는 불교가 국교(國敎)였을 만큼 융성하였고, 용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지구 신봉동 서봉사지(西峰寺地) 아래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웃의 모든 절들을 한 바퀴 도는 데 사흘이 걸렸고, 짚신 몇 켤레가 닳았다고도 한다. 이는 당시에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준다.

서봉사지 유적과 처인구 원삼면 미평리의 석불입상, 기흥구 공세동의 석조여래좌상과 5층석탑, 백암면 용천리의 5층석탑 등이 이 시대의 대표적 유물이다. 특히 서봉사의 경우 조선 후기까지 크게 융성했는데, 1601년(선조 34)에는 『인천안목(人天眼目)』, 『불조삼경(佛祖三經)』, 『불설예수시왕경(不屑預修十王經)』 등 10여 가지의 목판본을 간행할 만큼 불경 간행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불교에 대한 억압 정책에 따라 불교는 쇠퇴 일로에 놓였고, 용인 지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용인은 서울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교의 영향을 더욱 빨리, 크게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상대적으로 불교의 위축을 불러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 용인 지역이 왜군의 주요 공격로였기 때문에 무자비한 방화(放火)와 약탈로 대부분의 사찰이 소실되거나 폐사(廢寺)되고 만다. 이후 사찰들은 그대로 방치되거나, 복구되었다 해도 이전 규모에 훨씬 미치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는 불교의 위축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용인 지역에 오래된 명찰(名刹)이나 큰 절이 전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용인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로는 서봉사(瑞峰寺)가 18세기 말까지 존속되었고, 성불사(成佛寺), 선장사(禪長寺), 향수사(香水寺), 신림사(神林寺), 쌍령사(雙嶺寺), 용암사(龍巖寺), 보해암(普海庵) 등의 명칭도 눈에 띈다.

그러나 18세기의 기록인 『범우고(梵宇攷)』를 보면 위에 열거한 사찰들이 대부분 폐사되었고, 백련암(白蓮庵), 비봉사(飛鳳寺), 굴암사(窟巖寺) 등의 명칭이 나타나는데, 이는 조선시대 용인 지역에서 사찰의 존폐(存廢)가 심각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불교가 비록 기복 신앙적인 성격을 띠고, 부녀자 중심이었다 하지만 그 맥을 끈질기게 이어왔던 것처럼 용인 지역도 다른 지역에 비해 교세가 약화되기는 했지만 엄연히 유지되어 왔다.

이후 포교가 자유로워지면서 새로이 불교가 중흥기를 맞게 되고 활발하게 사찰의 창건이 이루어졌다. 용인 인근의 화운사(華雲寺)가 대표적인 사찰이다. 또한 열반종은 총본산을 용인에 두고 있으며, 해동종이 용인에 종무소를 두는 등 불교는 용인 지역의 대표적 종교로 자리하고 있다.

[사찰 유적]

용인에 남아 있는 신라 때의 유적으로는 백련암(白蓮庵), 용덕사(龍德寺) 등이 있고, 박곡사(朴谷寺)는 폐허가 되어 절터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말기와 고려시대 초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은 이동읍 어비리동도사에 남아 있다.

백련암포곡면 가실리 향수산 기슭에 있는데,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백련암은 801년(애장왕 2) 3월 5일에 신응(愼應)이 창건한 절로서, 1389년(공양왕 1)에 중수된 이래 몇 번의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절에는 조선 전기 무학대사가 중건할 때 조성한 18나한상 가운데 14위가 전해져 오고 있다.

현재 용주사의 말사인 용덕사(龍德寺)이동읍 묵리 성륜산에 있는 절이다. 신라 문성왕 때 영거선사(靈居禪師)가 창건하였고,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3층석탑 1기와 보살상, 철인(鐵人) 3위를 조성하면서 중창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위에 암굴이 있어 일명 굴암절이라 불린다.

현재 남아 있는 3층석탑은 도굴, 파손된 것을 다시 조합한 것이며, 철인 3위 가운데 각각 48㎝, 44㎝ 높이의 2위만이 암굴에 남아 있다. 이 철인은 이곳의 산세와 자리에서 솟아나는 지기(地氣)를 누르기 위해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이라 한다.

신라시대 절터로는 박곡사지(朴谷寺址)가 있다. 박곡사는 백암면 박곡리 대덕산 기슭에 있었던 절이다. 신라 때 창건된 절로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다. 삼층석탑 1기와 석불 1구가 남아 있었으나, 삼층석탑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가져갔다.

현재는 높이 110㎝, 너비 78㎝ 정도의 보살상 1구가 남아 있다. 최근에 500구의 나한상이 흩어진 채 땅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오백나한을 봉안한 나한도량임을 알 수 있는데, 지금도 절터 부근을 나한골, 오방난골이라 부른다.

현재 대중불교불이종 총본산인 동도사에 통일신라시대 말기와 고려시대 초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이 있어 경기도 문화재와 용인시 향토문화재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불교유물]

용인 지역 불교 유물로는 신라시대 석불인 목신리 석조여래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2호]과 천리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목신리 석조여래입상원삼면 목신리의 신촌부락에 있는데, 높이 175㎝, 무릎 폭 70㎝, 두께 33㎝이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육계가 있고 원만한 상호(相好)의 윤곽을 나타내 보이고 있으나, 얼굴 각 부분은 마멸이 심하다. 양쪽 귀도 훼손되어 윤곽만 있고, 목의 삼도(三道) 역시 분명하지 않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며, 앞가슴은 반원으로 노출되었다.

오른손은 외장(外臧)하여 시무외인(施無畏印)을 결하였고, 왼손은 손상되었으나 여원(與願)의 통인(通印)을 결한 모양이다. 법의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처지면서 서너 겹 깊은 골을 드리우며 아래로 흘렀다. 석불 뒤로는 가운데가 오목하게 파인 작은 판석이 하나 있는데, 석불의 보개석(寶蓋石)으로 보인다. 불상의 조상 수법으로 보아 7~8세기를 전후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천리 석조여래입상이동읍 천리 적동저수지 입구에 있었는데, 1960년대 초 저수지 축조 공사가 시행되면서 저수지 입구 왼쪽으로 옮기고 당우에 안치되었다가, 그 후 다시 용덕사로 이전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불상 전체를 백분으로 칠하여 원형의 식별이 어렵다. 대략 머리는 소발(素髮)인 듯하고, 육계는 식별되지 않는다. 법의는 통견이고 두 팔에서 흘러내린 천의는 발끝에 닿았다.

앞가슴에 원호로 나타나는 의문(衣紋)이 두 팔 아래부터는 길게 처지면서 양 다리 위로 하반신의 윤곽이 탄력 있게 드러나고, 군의(裙衣)의 옷주름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수결은 시무외, 여원의 통인으로 보이나, 손목 부분이 모두 없어져 확실하지 않다. 발목 아래는 묻혀 있으나, 전체적인 감각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외에 원삼면 학일리에서 발견된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은 용인에서 발견된 유일한 금동 불상이다. 전체 높이 11.3㎝, 불신 높이 8.5㎝, 좌대 2.8㎝인데, 도금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머리의 육계는 뚜렷하나 귀는 흔적만 남아 있다. 목의 삼도는 분명하지 않고, 법의는 통견으로 U형으로 앞가슴이 노출되었고, 두 팔에서 밑으로 흘러 발등까지 드리워져 있다. 배에는 희미한 군의의 매듭이 나타나고, 두 다리 위로는 하반신 윤곽이 선명하다.

대좌(臺座)는 복련(伏蓮)과 앙련(仰蓮)으로 8판씩 조각했으나 심하게 부식되었고, 복련 아래로 있는 8각의 받침 가운데 2면에 안상(眼象)을 새겼으나 역시 흔적만 있다. 손목은 파손이 심해 원형을 알 수 없다. 뒷면에 돌기 부위가 있어 광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인 조형(造形)과 수법으로 보아 대략 8세기 신라의 불상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5.15 행정지명 현행화 이동면에서 이동읍으로 변경 사실 반영
2012.01.05 [사찰 유적] 추가 외 1) 박곡사(朴谷寺)는 폐허가 되어 절터만 남아 있다. 백련암은 ->박곡사(朴谷寺)는 폐허가 되어 절터만 남아 있다. 이동면 어비리 동도사에 남아 있다. 백련암은 2) [사찰 유적] 추가 <문단>현재 대중불교불이종 총본산인 <기관>동도사</기관>에 통일신라시대 말기와 고려시대 초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이 있어 경기도 문화재와 용인시 향토문화재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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