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물과 역사의 물결이 드나드는 아산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392
한자 文物-歷史-牙山灣
영어공식명칭 Asan Bay: The Historical Foothold of Cultural Exchange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병조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당진시와 경기도 평택시 사이[한반도 중부]에 자리하며, 조차가 크고 만입의 깊이가 깊어 고대 이래로 국내외 지역과 다양한 형태로 문물이 교류되는 만.

[개설]

한반도 중부에 자리 잡은 충청남도 아산만은 서해안에 발달한 수많은 만 가운데 특히 만입의 깊이가 깊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만이다. 만의 입구인 충청남도 당진의 한진(漢津) 부근에서 가항종점(可航終點)이었던 예산 구만포까지 거리가 무려 40㎞에 이른다. 유량이 많지 않은 하천이지만, 밀물을 이용하면 내륙 깊숙한 곳까지 배의 운항이 가능했기 때문에 도로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전통 시대에 아산만 일대는 접근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아산만 연안은 연안의 각 지역 간 연결은 물론 다른 지역과의 연결에 유리하였고, 나아가 일본, 중국 등 다른 나라와도 연결되었다.

아산만 연안은 이러한 지리적 특징을 배경으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왔다. 예를 들면, 아산만 주변은 서해안 두레 문화권으로 묶일 수 있으며, 타령조의 경기 서부 소리권에 속한다. 언어도 비슷한 점이 많으며, 연안 지역은 단일 시장권으로 묶인다. 아산만에 인접한 도시는 아산시를 비롯하여 충청남도 당진시, 예산군, 경기도 평택시 등 시·도 경계를 넘나드는 여러 지역이지만, 아산만 연안 지역은 아산만을 매개로 여러 가지의 동질적 문화 요소를 공유하고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아산시는 아산만으로 유입하는 두 개의 하천인 삽교천과 안성천이 모두 닿는 지역으로, 아산만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이다. 두 하천의 본류는 아산시 인주면에서 합류하는데, 안성천은 둔포면-영인면-인주면을 흐르고 삽교천선장면인주면을 지난다. 또한, 삽교천의 지류인 곡교천이 아산시 동부(洞部) 북쪽을 지나며, 안성천의 지류인 둔포천이 아산시 북단의 둔포면을 흐른다. 삽교천 본류에 접한 선장면은 대부분 배가 닿았으며, 곡교천실옥동과 맞은편의 염치읍 곡교리까지, 둔포천둔포면 시포리 일대까지 항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역사를 관통하면서 아산의 지역성을 만드는 데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쳐 왔다.

[자연지리적 배경]

아산만은 조차가 9.6m에 달해 우리나라에서 조차가 매우 큰 편에 속한다. 조차가 큰 서해안의 특성은 오늘날에는 항구 발달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측면도 있지만, 과거에는 오히려 밀물을 이용하여 내륙 깊은 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풍력과 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선박이 소형이었으므로 밀물을 이용하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하천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철도와 도로 등 육상교통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이러한 특징을 이용하여 수로 기능이 잘 발달하였다.

동북쪽에서 아산만으로 유입하는 안성천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에서 발원하여 청룡천[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내강리에서 발원], 진위천[경기도 용인시 이동읍 천리에서 발원]과 합류한다. 진위천 지류는 오산천[용인시 중동 석성산에서 발원], 황구지천[경기도 의왕시에서 발원] 등이다.

남쪽으로 흘러드는 삽교천은 충청남도 홍성군 오서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는데, 무한천[충청북도 청양군 화성면 백월산에서 발원], 곡교천[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에서 발원]과 합류한다. 곡교천온양천[아산시 송악면 거산리 각흘고개에서 발원], 천안천[천안시 안서동 성거산 자락에서 발원], 풍서천[천안시 광덕면 광덕산 남서쪽에서 발원] 등의 지류를 합친다.

이 하천들을 따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배가 운항할 수 있었다. 안성천 본류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신호리까지, 삽교천은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까지가 밀썰물 구간이었다. 따라서 연안에 많은 포구가 발달하고 있었다. 이 포구들은 일제강점기까지 그 기능이 상당 부분 유지되었으며,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도 포구의 기능이 일부 남아 있었다.

[대(對)중국 교류의 거점]

선사시대부터 아산만을 통한 대외 교류가 있었다는 뚜렷한 증거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지만,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예를 들면, 아산시와 인접한 천안시 지역의 청동기 유적에서 중국제 자기가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선사시대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이고, 그 통로가 아산만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원삼국시대인 2~3세기에는 낙랑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유물이 있다. 원통형 토기가 그것인데, 이는 제작 기법으로 볼 때 낙랑과의 관련성을 보여 주는 유물로 아산 지역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곡교천에 인접한 탕정면 갈산리·명암리[밖지므레]에서 발견된 유물로 아산만을 통해 교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본격적으로 아산만이 중국, 일본 등 주변국과 교류의 통로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이후이다. 6세기경 백제는 중국의 남조와 해로를 통하여 활발하게 교류하였는데, 그 경로 가운데 하나가 아산만[당진 한진]에서 온양을 거쳐 천안-전의-웅진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임존성[예산군 대흥면]이 백제 부흥 운동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이유도 이곳이 삽교천의 지류인 무한천을 통하여 아산만-중국으로 연결되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당진(唐津)’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당시 아산만을 통해 대당(對唐)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진포(唐津浦)[또는 당포(唐浦)]라는 지명은 아산시 영인면의 안성천 연안[영인면 창용리]에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아산만이 역사를 관통하면서 대중국 거점 역할을 했던 곳임을 말해 준다.

[아산만을 통한 외적의 침입]

고려시대 몽골 침입 때 아산만 일대에서는 여러 차례 전투가 있었다. 당시 아산만은 고려의 임시 수도였던 강화도로 연결되는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아산만은 강화도로 가는 조운로상의 요충이었으므로, 피아간에 조운로의 확보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산만에서 뱃길로 이틀이면 강화도에 닿을 수 있었으므로 방어하는 입장에서도, 공격하는 입장에서도 아산만의 확보는 매우 중요했다. 특히, 몽골군은 아산만이 강화도 공격을 위한 교두보였으므로 이곳을 확보하기 위해 집요하게 이 지역을 공략하였다.

고려 말 아산만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충청도에서는 차령산지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큰 하천이 흐르는데, 금강과 삽교천이 그것이다. 왜구는 내륙으로 침입하여 농산물 등을 약탈했으므로 내륙으로 연결되는 수로가 중요하였다. 금강 유역과 아산만 연안은 공통적으로 뱃길로 내륙 깊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그만큼 왜구의 침탈 가능성이 컸다.

구한말 격동기에 아산만은 외국 침략자들의 교두보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 함대는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 아산만 입구에 있는 풍도 앞에 군함을 정박하고 작은 배에 병력을 나누어 싣고 강화도 인근을 정탐하였다. 강화도와 아산만은 매우 가까운 거리였으며, 강화도는 한성부로 진입하기 위한 입구에 해당하였다.

아산만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와 일본의 격전지였다. 갑오농민혁명을 빙자하여 국내에 진입한 청군과 일본군이 아산만 풍도에서 첫 번째 전투를 치르면서 청일전쟁이 촉발되었다. 첫 번째 전투 이전에 이미 청군은 아산만을 통해 백석포[아산시 영인면]로 상륙하여 성환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아산만이 침략의 통로로 이용된 것이다. 풍도에서 첫 번째 전투가 벌어진 이유는 당시까지 이 지역이 대중국 전진항이었음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큰 배들이 육지와 본국의 연결을 위해 아산만 입구에 정박하였고, 이를 견제하던 일본군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도권과의 연계가 원활했던 위치]

백제시대에는 한성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때 아산만이 교류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배방읍 갈매리 백제 유적에서 한성기 육각형 주거지와 부뚜막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시 아산만을 통하여 수도권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려 초기에 아산만은 고려와 후백제의 각축장이었다. 아산만 이남의 맹주였던 견훤과 개경을 세력 기반으로 하는 왕건은 아산만을 두고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아산만의 확보는 두 진영 모두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아산만과 통하는 삽교천 유역의 내포[면천] 지방은 곧바로 아산만을 통해 개경으로 연결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내포 출신의 복지겸을 측근으로 두어 아산만 일대를 장악한 왕건은 이 일대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는데, 둔포면 신법리 토루나 배방산성 등은 고려시대 아산만 연안의 군사적 중요성과 관련이 깊은 유적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아산만의 국제적 교류 역할은 이전보다 매우 축소되었다. 이는 개국 이래 대외 정책 기조를 쇄국으로 일관했던 조선의 정책과 관련이 깊었다. 대신에 아산만은 근기권(近畿圈)으로서 조운의 요충지가 되었다.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연결되는 조운로의 요충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하고 민간인에 의한 물자의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연안에 크고 작은 포구가 발달하여 한성과의 연결이 더욱 활발해졌다.

[조운의 요충지]

아산만은 고려시대 이후 조운(漕運)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운이 시작되었던 고려시대에 아주(牙州)하양창(河陽倉)이 설치되었다. 안성천 하류의 경양포[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 있었던 하양창은 고려시대 13창의 하나였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삽교천 유역에는 당성창(溏城倉)[지금의 아산시 선장면 장곳리]이 설치되어 인근의 세곡을 모아 아산만을 통해 개경으로 운반하였다. 당성창은 삽교천의 지류인 무한천 연안에 있었다. 자유 곡류로 지형이 변화되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대략 삽교천과 무한천의 합류 지점으로부터 무한천으로 약 5리[약 2㎞] 지점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곳에는 성을 쌓고 만호를 두어 관리했을 만큼 중요한 창고였다.

하지만 당성창은 하상 퇴적으로 수심이 얕아지면서 점차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면천의 범근내포(犯斤乃浦)[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로 조창이 이전하였다. 이곳은 곡교천삽교천 합류 지점의 건너편인데,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하상이 퇴적되어 공세곶으로 다시 조창이 옮겨지게 되었다[성종 9].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조운 기능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공세곶창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공세곶창은 이후 1523년(중종 18) ‘공진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국 9대 조창에 속했던 공진창의 관할 범위는 동으로는 옥천, 북으로는 평택, 남으로는 서천에 이르는 지금의 충청남도와 대전광역시 전역, 그리고 충청북도 일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한성·경기 사대부의 터전]

삽교천 연안의 여러 지역을 일컫는 내포(內浦)는 조선시대에 주로 회자하였던 지역 이름이다. 아산시는 전체가 모두 내포의 영역에 속하지는 않지만, 조선시대 신창현내포의 영역에 보통 포함이 된다. 『택리지(擇里志)』에서는 내포를 "가야산 주변의 열 개 고을"로 정의했는데, 여기에 신창현을 포함하고 있다. 내포에 포함되지 않는 아산현, 온양군 지역도 아산만과 연결되는 ‘육지 안쪽의 포구[內浦]’가 발달하므로 내포와 유사한 지역성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내포의 지역성은 수로로 한성·경기 지역과 잘 연결되면서도 물리적 거리가 수도권과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이중적 위치와 관련이 깊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 특성으로 한성과 풍속이 비슷하며, "한성 사대부 중에 이곳에 생활의 근본을 두지 않은 자가 없는 지역[택지리]"이 되었다. 이러한 내포의 특성은 아산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아산시에는 한성, 경기도에서 이주한 가문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신창맹씨, 덕수이씨, 예안이씨 등이다. 이들 가문은 공통적으로 한성·경기에서 이주 정착하였으며, 정착 후에 대를 이어 세거하였다. 혹은 토착화하기도 했지만, 한성·경기와의 관련성을 유지하면서 많은 사대부를 배출하였다.

[초기 천주교 전파의 핵심 지역]

아산만 일대는 18~19세기 천주교 초기 전래 과정에서 만들어진 독특한 천주교 문화를 가진 지역이다. ‘내포의 사도’라 일컬어지는 이존창(李存昌)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하기 전까지 내포 지역에 천주교사에 길이 남는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이존창이 일찍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내포 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아산만을 통하여 한성과 경기도와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산에 초기 천주교 관련 역사가 뚜렷한 이유도 이러한 지리적 조건과 관련이 있다. 즉, 아산만으로 연결되는 육지 안쪽의 수많은 포구(內浦)가 천주교를 전파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점에서 초기 내포교회의 영향권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박해를 피해 천주교도들이 은거했던 교우촌이 아산시 일대 여러 곳에 있었다. 강장리, 수곡리, 강당리, 유곡리, 거산리, 마곡리송악면 일대 산지[광덕산, 봉수산 등] 지역에 집중했던 교우촌은 아산만 주변에 나타났던 초기 천주교 역사를 잘 보여 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순교한 다블뤼 주교가 아산 방사골[송악면 마곡리]에 1865년에 거주하였던 사실이나, 병인박해 소식을 본국에 알리기 위해 리델 신부가 아산 용당리[선장면 가산리]에서 중국으로 탈출했던 역사도 같은 맥락이다.

초기 천주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세리성당 역시 아산만과 관련하여 설명해야만 한다. 합법화된 이후 내포 최초의 교회였던 양촌 본당[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에서 1895년 독립한 본당이 바로 공세리 본당이었다. 아산만을 배경으로 설립된 공세리 본당은 설립 당시 관할 구역이 아산 지역뿐만 아니라 천안, 공주, 안성, 진천 등 충청도 일대와 경기도에 미칠 만큼 넓었는데 이를 통해 천주교사에서 아산만의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일제 침략과 식민지 무역 체제로의 편입]

아산만 일대는 구한말부터 노골화되었던 일본의 식민지 무역 체계로 편입되는 데 유리한 입지였다. 식민지 무역의 중심이었던 인천항과 뱃길로 바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농촌 지역에서 수집된 농산물이 가까운 항구를 통해 인천으로 이동하였고, 반면에 인천항으로 유입한 일본산 공업 제품들이 배편으로 전국으로 분배되었다. 아산만 연안의 많은 포구가 이와 같은 식민지 무역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아산의 선장포, 둔포가 대표적이었다. 둔포와 온양에는 중국 청나라 상인이 들어와서 대일 무역을 담당했는데 일본산 공업제품[방적사, 옥양목, 성냥, 석유, 염료 등]을 들여오고 쌀을 비롯한 곡물을 반출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둔포는 당시 충청도에서 가장 많은 양의 쌀을 반출하는 포구였으며, 선장포 역시 인근에서 수집된 쌀을 적출하는 큰 포구였다. 200석까지 실을 수 있는 일본 배가 둔포에 출입했으며, 아산만에서 500~600석을 실을 수 있는 큰 배에 옮겨 싣고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둔포의 상권은 수원, 안성, 천안에 이를 정도였다. 곡교천 유역에서는 장구포중방포가 이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근대 교통수단인 철도와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포구들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하락하게 되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아산만의 역할이 하락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04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어 평택역이 대일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둔포의 지위가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신작로[천안~온양]가 개통된 것도 아산만의 위상이 바뀌기 시작한 이유였다. 그러나 신작로는 온양온천을 이용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이 주로 이용했으므로 그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 결정적으로 1922년 충남선 철도[천안~예산]가 개통되면서 아산만의 위상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수로를 통해 이루어지던 대일 교역을 상당 부분 철도가 대신하게 되면서 지역 내 시장권의 변동이 생겼다. 삽교천 연안의 선장은 상업 중심지 역할을 온양장에 내주게 되었고, 모산역 일대가 상업지구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온양읍치는 ‘구온양’으로 불리며 점차 중심성을 상실해가기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 아산만의 변화]

장항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아산만으로 연결되는 포구의 기능은 매우 축소되었다. 특히 식민지형 교역 기능은 많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후반부터 아산만 연안과 인천항을 연결하는 여객선이 취항하면서 아산만 연안 포구의 성격이 변화하였다. 대부분 연락선의 기항지는 충청남도 당진시에 속했지만, 아산시에 속하는 포구로는 선장포가 있었다. 인천항까지 7시간 정도 걸리는 이 뱃길은 아산만 주변과 인천을 연결함으로써 두 지역 간에 물적, 인적 교류를 유발하였다. 실제로 아산만 연안에서 인천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상당수에 이르러 지금도 인천에는 아산만 연안 출신의 1, 2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삽교천 하구에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인천항과 아산만을 오가던 여객 항로가 폐지되어 아산만의 포구로서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1973년 안성천 하구에 아산만방조제가 건설되었고, 1979년에는 삽교천방조제가 완성되었다. 아산만방조제가 건설되면서 1억 2300만 톤을 저수할 수 있는 거대한 담수호인 아산호가 탄생하였다. 이어서 아산만방조제의 약 4배가 되는 삽교호방조제가 건설됨으로써 삽교호가 조성되었다. 방조제 안쪽의 아산만은 포구의 기능을 상실한 대신 관광·레저 기능과 농업 기능이 발달하게 되었다.

[21세기 서해안 시대의 아산만]

세곡 수송, 식민지형 교역 수행, 그리고 여객 수송 등 아산만의 전통적 기능은 거의 상실되었다. 다른 나라와의 교역 기능 역시 일제강점기가 끝나면서 상실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당진시와 평택시를 중심으로 아산만의 역할이 증가하고 있다.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항구 기능이 부활하고 있으며, 서해안고속도로로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짐으로써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특히 평택항은 아산만 지역이 국제 물류의 중심지로 변화하는 데 있어 핵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수도권과 인접한 지역으로서 아산시의 위상도 역시 높아지고 있는데, 삽교천 하류 연안에 있는 완성차 공장을 필두로 많은 공업 시설이 들어서는 등 많은 지역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과거와는 엄청나게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였지만, 아산만은 앞으로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문화와 경제 교류에서 꾸준히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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