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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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川里-鳳山面- |
영어음역 | Gwangcheon-ri[Bongsan-myeon]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동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광동(廣洞)의 ‘광(廣)’자와 곤천(坤川)의 ‘천(川)’자를 따서 광천(廣川)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충청북도 황간군 황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경상북도 김천군 봉산면 광천동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금릉군 봉산면 광천동이 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광천리가 되었고, 1995년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서북쪽에 봉화산이 솟아 있고, 추풍령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남쪽으로 흘러 직지천과 합류한다.
[현황]
광천리는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12.25㎢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199세대에 294명(남자 151명, 여자 14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상금리, 서쪽으로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남쪽으로 신암리, 북쪽으로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과 이웃하고 있다. 광천1리·광천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광주 이씨·충주 박씨·안동 김씨·해주 오씨·밀양 박씨 등 여러 성씨가 대를 이어 살고 있다. 경부고속국도·경부선철도·국도 4호선이 지나고, 농경지가 좁아 밭작물을 주로 경작하는데 최근 포도와 더덕이 주종을 이룬다.
자연 마을로는 가성·신기·시목(柹木)·죽막(竹幕)·돈목(敦木)·송라(松羅) 등이 있다. 시목 또는 감나무골은 임진왜란 직후인 1597년경 파평 윤씨와 은진 송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예부터 감나무가 많아 붙인 이름이다. 죽막은 추풍령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있어 일찍이 주막이 들어섰고 임진왜란 직후 전주 이씨·경주 김씨·충주 박씨가 옮겨 오면서 본격적으로 마을이 이루어졌다. 대나무 밭 옆에 주막이 있어 주막거리 또는 대막골로 불리었고 죽막은 이를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1592년 4월 23일 임진왜란 때 김천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인 김천역전투에서 패한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1541~1609] 장군이 흩어졌던 군사 500명을 추풍령에 집결시켜 전투에 임할 때 죽막에 있는 주막에서 작전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4월 26일 밤부터 새벽까지 벌어진 추풍령전투에서는 김천에 주둔한 왜병의 북진 선발대 수백 명을 야간에 황소 꼬리에 불을 붙여 적진에 밀어 넣는 전술로 몰살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4월 27일 1만 명의 왜병과 맞붙은 추풍령전투 2차전에서는 조경이 포위되어 돌격장 정기룡(鄭起龍)[1562~1622]의 분전으로 구출되기도 했으나 군사 500명 가운데 절반을 잃고 지금의 추풍령휴게소 서쪽 선계산(仙界山)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추풍령 전투에서 비록 패했으나 노도(怒濤)와 같이 밀려오는 왜벙의 북진을 지연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추풍령휴게소가 들어선 일대의 지명과 관련해서 흥미 있는 일화가 전해 온다. 옛날 이곳을 지나던 노승(老僧)이 장차 전국에서도 이름난 놀이터가 될 것이라고 예언해서 이 골짜기를 다락골[多樂谷]이라 불렀는데 실제로 경부고속국도가 나면서 추풍령휴게소가 생겨 연중 행락객으로 붐비고 있으니 필시 예사롭지 않은 예언이었던 듯하다.
돈목은 죽막 고속도로 진·출입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금릉공원 방면으로 가다 보면 깊숙이 들어앉아 있다. 돈목 역시 임진왜란 직후에 난을 피해 광주 이씨와 청주 한씨가 이주해 오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마을 입구에 돌이 많아 돌목이라 부르다가 나중에 한자로 표기하면서 이씨와 한씨 두 집안이 서로 화목하고 정답게 살라는 뜻에서 돈목이라 하였다.
송라는 추풍령휴게소 위쪽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과 이웃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뒤로 소나무가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아 붙인 이름이다. 달리 소래실이라고도 한다.
곤천은 국도 4호선을 따라 추풍령 방면으로 가다가 낙원식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1㎞ 남짓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난함산(卵含山) 자락 곤천골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에 남양 홍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고 이후 밀양 손씨와 해주 오씨가 정착하였다. 지금은 대부분 떠나고 각성(各姓)이 들어와 살고 있다. 마을 앞에 건천(乾川)이 있어 고려 말까지는 같은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조선 시대에 황간군 백호동 촌장을 역임한 이 마을 출신 손정만이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따져 마을의 풍요를 기원하며 곤천으로 고쳤다고 한다.
곤천에는 집성을 이루며 살던 밀양 손씨 집안의 이름난 효자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손씨 성을 가진 선비의 늙은 어머니가 중병으로 누운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엄동설한에 홍시를 먹고 싶어 하였다. 가난하여 끼니도 이을 수 없는 터에 선비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눈 덮인 선계산에서 홍시를 구하려고 3일간 헤매었으나 구하지 못하였다. 이에 낭패하여 통곡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토끼가 나타나 발자국을 따라갔더니 양지 바른 곳에 산 감나무가 있어 홍시를 구해 어머니의 병을 고쳤다. 그 이후부터 주민들은 감나무가 있던 골짜기를 신령스럽게 여겨 신령골[神靈谷]이라 칭하였다.
곤천을 벗어나 추풍령 방면으로 조금 가면 오른쪽에 광동이 자리 잡고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들판이 골짜기를 따라 넓고 길게 펼쳐져 있어 붙인 이름이다. 대부분의 들판이 마을 아래에 있어 농사지을 때 내려가서 일을 한다 하여 니리골, 당마루[唐嶺]에 진을 쳤던 당나라 군사들이 내려간 마을이어서 니릿골이라고도 한다.
당마루는 신라의 통일 전쟁에 참가한 당나라 군사들이 마을 우물 근처에 진을 치고 주둔했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하고, 옛날 김천에서 한양으로 갈 때 봉계·신암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가파른 당나귀 등처럼 되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근년까지 당나라 군사들이 사용했다는 우물이 있었다고 하며, 죽막 아래에는 당나라 군사들이 회군했다는 당령교(唐嶺橋)가 있다.
마을 앞에는 두 개의 예사롭지 않은 입석(立石)이 있는데 마을 주민에 따르면 옛날 양천 허씨 집안의 힘센 장수가 마을 뒤 법구골에서 지고 내려와 이곳에 세우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게 했다고 전한다. 조선 중엽에 양천 허씨가 처음 마을을 개척하였고 이후 현풍 곽씨·장수 황씨·안동 김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