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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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隆 |
영어공식명칭 | Kim Ryung |
이칭/별칭 | 도성(道成),물암(勿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549년 - 김륭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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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0년 - 김륭 두릉서당 건립 |
활동 시기/일시 | 1593년 - 김륭 집경전참봉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594년 - 김륭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51년 - 김륭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증직 |
추모 시기/일시 | 1654년 - 김륭 삼봉정사 제향 |
출생지 | 김륭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
수학|강학지 | 도산서당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
수학|강학지 | 이산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원리 |
수학|강학지 | 두릉서당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 748 |
묘소|단소 | 김륭 묘소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 |
사당|배향지 | 삼봉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함창(咸昌) |
대표 관직|경력 | 집경전참봉 |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출신의 학자.
[개설]
김륭(金隆)[1549~1594]은 박승임(朴承任)[1517~1586]과 이황(李滉)[1501~1570]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이다. 이산서원과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가계]
김륭의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도성(道成), 호는 물암(勿巖)이다. 아버지는 사재감참봉을 지낸 김응린(金應麟), 어머니는 참봉을 지낸 곽자보(郭子保)의 딸 공인 현풍곽씨(玄風郭氏), 할아버지는 봉화현령을 지낸 김구식(金龜息), 증조할아버지는 전생서주부를 지낸 김시경(金諟敬)이다. 김륭의 부인은 습독을 지낸 문경제(文經濟)의 딸 증 숙부인 감천문씨(甘泉文氏)이다.
[활동 사항]
김륭은 1549년(명종 4) 영천군(榮川郡) 신천리(新川里)[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서 출생하였다. 14세 때 박승임에게 학문을 배웠고, 16세 때에는 스승 박승임을 따라 한양을 유람하였다. 18세 무렵 박승임은 김륭을 이황의 문하로 보내었고, 학업을 장려하는 시를 지어 주었다. 19세 무렵에는 이황이 있는 예안현 도산(陶山)으로 가서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배웠다.
김륭은 22세가 되던 1570년(선조 3) 고향 북쪽 5리 지점에 두릉서당(杜稜書堂)[지금의 봉화군 적덕리]을 완공한 후, 두릉서당을 강학과 독서의 장소로 삼았다. 이에 이황이 직접 ‘두릉서당’이라는 편액을 써주었고 시를 지어 칭송해 주었다. 1570년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심상(心喪)하였으며, 1572년에는 도산에서 동문들과 함께 스승을 제향하는 상덕사(尙德祠) 건립을 논의하였다. 또 1573년에는 이산서원에서 공부하였고, 스승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처럼 김륭은 지금의 영주·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이황에 대한 각종 현양 사업에 앞장섰으며, 박녹(朴漉)[1542~1632]·김륵(金玏)[1540~1616]·김개국(金蓋國)[1548~1603]·이안도(李安道)[1541~1584]·이덕홍(李德弘)[1541~1596]·권우(權宇)[1552~1590] 등의 명현들과 교유하였다.
김륭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도내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규합하였다. 1593년 체찰사 류성룡(柳成龍)[1542~1607]에게 글을 올려 시무를 건의하였다. 1593년 재행으로 천거되어 집경전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은하고 돌아왔다.
[학문과 저술]
김륭의 문집은 5권 3책의 『물암집(勿巖集)』이 전한다. 그중에서도 권3과 권4는 이황 문하에서 공부할 때 들은 자구의 석의를 기록한 강록(講錄)이어서, 당시 이황 문인들의 학문 활동을 보여준다.
[묘소]
김륭의 묘소는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 두릉골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륭은 1651년(효종 2)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다. 1654년 삼봉정사(三峯精舍)에 제향되었다. 삼봉정사는 1700년(숙종 26) 삼봉서원(三峯書院)[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으로 승격되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된 후 복설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