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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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應奎 |
영어공식명칭 | Hwang Eung-gyu |
이칭/별칭 | 중문(仲文),송간(松澗)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18년 - 황응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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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43년 - 황응규 생원시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569년 - 황응규 알성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72년 - 황응규 인제현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75년 - 황응규 청도군수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79년 - 황응규 단양군수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88년 - 황응규 낙향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황응규 절충장군 가자 |
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황응규 동지돈녕부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598년 - 황응규 사망 |
출생지 | 황응규 출생지 - 서울특별시 |
거주|이주지 | 황응규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백리 |
부임|활동지 | 황응규 부임지 - 경상북도 청도군 |
부임|활동지 | 황응규 부임지 - 충청북도 단양군 |
묘소|단소 | 황응규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묵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창원(昌原) |
대표 관직 | 전생서주부|호조정랑|청도군수|동지돈녕부사 |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황응규(黃應奎)[1518~1598]는 문과 급제 후 전생서주부·호조정랑·청도군수·동지돈녕부사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켰다.
[가계]
황응규의 자는 중문(仲文), 호는 송간(松澗),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아버지는 우참찬 황사우(黃士祐)[1486~1536]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영일오씨(迎日吳氏)이다. 부인은 의빈도사 이수려(李壽旅)의 딸 정부인 여흥이씨(驪興李氏)이다. 아들은 황섬(黃暹)[1544~1616]·황시(黃是)[1555~1626]이며, 사위는 영의정을 역임했던 류영경(柳永慶)[1550~1608]이다.
[활동 사항]
황응규는 1518년(중종 13) 한양 동리(東里)에서 출생하였다. 1543년(중종 38) 생원시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태학에서 황응규를 추천하여 전함사별제와 장흥고직장에 제수되었다. 1569년(선조 2) 알성시 문과에 급제, 전생서주부에 임용되고, 호조·형조·공조의 정랑과 좌랑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572년 인제현감에 제수되었으나, 1573년 파직당하였다. 1575년 청도군수로 부임하였는데, 재임 중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애민비를 건립하였다.
황응규는 1579년(선조 12)에는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고을의 폐단을 바로잡고 농민들이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황응규 선정에 감복한 백성들이 조정에 요청하여, 임기가 완료되었음에도 1년을 더 재임하였다. 1585년 사섬시정에 제수되었고, 1588년(선조 21)에는 사직하고 고향인 경상도 풍기군 백동[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백리]으로 내려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곡을 군량으로 바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르고, 1594년(선조 27)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또한 향병대장(鄕兵大將)으로 추대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의기를 고취하고, 장정·군량 등을 모집하는데 진력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황응규는 주세붕(周世鵬)[1495~1554]에게 수업을 받았으며, 이후 이황(李滉)[1501~1570]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1910년 간행된 창원황씨 문집인 『회산세고(檜山世稿)』에 황응규의 문집 『송간고(松澗稿)』가 실려 있다.
[묘소]
황응규의 묘소는 영주시 안정면 묵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황응규는 아들 황섬이 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면서, 이조판서와 홍문관·성균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행장은 홍희준(洪羲俊)[1761~1841], 묘갈명은 이산해(李山海)[1539~1609]가 지었으며, 글씨는 심돈(沈惇)[1569~1646]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