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622
한자 柳永慶
영어공식명칭 Ryu Yeong-gyeong
이칭/별칭 선여(善餘),춘호(春湖),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0년연표보기 - 류영경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2년 - 류영경 정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83년 - 류영경 고산도찰방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99년 - 류영경 병조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9년 - 류영경 사헌부대사헌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2년 - 류영경 우의정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4년 - 류영경 호성공신 2등 녹훈
활동 시기/일시 1604년 - 류영경 좌의정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8년 - 류영경 경흥부 유배
몰년 시기/일시 1608년연표보기 - 류영경 사사
추모 시기/일시 1623년 - 류영경 복관
거주|이주지 류영경 낙향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 지도보기
외가|처가 류영경 처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백리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류영경 부임지 - 함경남도 안변군
유배|이배지 류영경 유배지 - 함경북도 경흥군
묘소|단소 류영경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전주(全州)
대표 관직 이조판서|좌의정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지역에 거주한 문신.

[개설]

류영경(柳永慶)[1550~1608]은 이조판서·좌의정 등을 지낸 문신이며,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가계]

류영경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선여(善餘), 호는 춘호(春湖)이다. 아버지는 문소전참봉을 지낸 류의(柳儀), 어머니는 사도시첨정을 지낸 노첨(盧僉)의 딸 증 정경부인 교하노씨(交河盧氏), 할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류세린(柳世麟)[1490~?], 증조할아버지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류헌(柳軒)[1462~1506]이다. 부인은 동돈녕부사를 지낸 황응규(黃應奎)[1518~1598]의 딸 정경부인 창원황씨(昌原黃氏)이다.

[활동 사항]

류영경은 1572년(선조 5)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삼사의 관직을 거쳐 1583년(선조 16) 고산도찰방으로 부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 가는 선조를 호종하였으며, 초유어사로 임명되어 황해도 지역을 순찰하였다.

류영경은 1599년(선조 32) 병조판서·사헌부대사헌을 거쳐, 1602년에는 우의정, 1604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선조 말년 소북의 영수로 활동하였는데, 선조의 뜻에 따라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永昌大君)[1606~1614]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다. 류영경은 선조가 죽기 전 영창대군의 보위를 부탁한 유교칠신(遺敎七臣) 가운데 한 명이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 세력이 권력을 잡은 뒤 정인홍(鄭仁弘)[1535~1623]과 이이첨(李爾瞻)[1560~1623]의 탄핵으로 경흥부에 유배되었으며, 1608년 사사되었다.

류영경은 젊은 시절 처가가 위치한 경상도 풍기군(豊基郡) 희여골[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백리]에서 3년 동안 공부하였다. 희여골은 풍기의 벌족인 창원황씨가 세거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류영경은 가족을 인근 순흥 지역으로 피난시켰다. 전란 중인 1597년 경상좌도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에는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1629]와 풍기에서 만났으며, 그곳의 편액을 ‘군자정(君子亭)’이라고 써주었다. 또 잠시 낙향하여 풍기로 내려왔을 때 둘째 아들 류흔(柳忻)이 병사하자 이자산(二子山) 아래에다 매장하였으니, ‘이자’라는 이름은 류영경의 둘째 아들 묘소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죽은 아들에 대한 정을 잊어버리기 위해 그곳의 이름을 망정동(忘情洞)[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 일대]이라고 하였으며, 만년에 여생을 보낼 장소로 삼았다. 이후 후손들이 망정동 일대에 세거하게 되었다.

[묘소]

류영경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류영경은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며, 전양부원군에 봉해졌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자 인조는 바로 류영경을 복관시켰고,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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