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표상이 된 맹사성과 이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402
한자 儒學-表象-孟思誠-李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기승

[정의]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유학의 발달 과정과 대표적인 유학자인 맹사성이간의 이야기.

[아산 지역 유학의 전래]

유교는 기원전 4세기경 중국으로부터 한자 문화를 수용하면서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삼국시대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유교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아산 지역을 관할하였던 백제에서는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 유교 경전을 전공한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둘 정도로 유교를 중시하였다. 온조왕 대에 온양에 탕정성(湯井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또 아산에 백제시대부터 쌓았던 것으로 보이는 산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백제의 충효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가치가 아산 지역에도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와 과거제(科擧制)를 거치면서 유교는 지배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념으로서의 역할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술현(牙述縣)아주(牙州)로, 굴직현(屈直縣)신창현(新昌縣)으로 지명이 바뀌는 등 아산의 지역 문화 형성에 유교적 가치를 담고 있는 한자 문화의 영향력이 커졌다. 지역의 토착 세력인 호족(豪族) 연합정권의 형태로 출범한 고려는 이전보다 지방과 중앙의 연결성이 강화되었다. 고려 중앙 귀족이 성씨와 관향(貫鄕)[시조(始祖)가 난 곳]의 개념을 갖게 된 것은 전국 각 지역의 토착 세력이 충효 윤리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가치를 충실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확립되기 시작한 본관(本貫) 중에 아산을 본관으로 한 성씨의 유래에서 아산 지역 유학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신창맹씨(新昌孟氏)는 고려 말 충혜왕 대에 맹의(孟義)가 반란 진압에 공훈을 세워 신창백(新昌伯)이 되면서 신창을 맹씨의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신창맹씨대동보(新昌孟氏大同譜)』에 의하면, 9세기 말 당나라가 멸망할 때 맹자(孟子)의 후손 맹승훈(孟承訓)이 유교의 경전과 공자의 상을 모시고 배를 타고 아산만에 도착한 후 신창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아산의 유학은 9세기 말 맹자의 후손이 신창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신창표씨(新昌表氏)는 충숙왕 대에 표인려(表仁呂)가 좌리공신(左理功臣)이 되어 온창백(溫昌伯)에 봉해지는데, 이후 표씨는 신창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신창표씨는 960년 중국 후주(後周)의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표대박(表大㺪)이 배를 타고 아산으로 와서 신창에 정착한 것을 조상의 기원으로 삼는다. 아산장씨(牙山蔣氏)는 12세기 초 고려 예종 대에 중국 송나라의 장군이었던 장서(蔣壻)가 배를 타고 아산으로 와서 정착하여 아산군(牙山君)에 봉해졌던 것을 성씨의 기원으로 삼는다. 아산을 본관으로 하는 중국 귀화 성씨 설화는 고래로 중국과의 수로 교통이 활발했던 아산 지역이 나말여초(羅末麗初)부터 중국으로부터 유교 문화를 받아들였음을 말해 준다.

신창맹씨맹희도(孟希道)맹사성(孟思誠)[1360~1438] 부자, 신창표씨의 표연말(表沿沫)과 표빙(表憑) 부자, 아산장씨장영실(蔣英實) 등은 조선 초기 조선의 유교 문화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7세기 아산 유학의 진흥을 토대로 18세기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제기하여 기호(畿湖) 유학의 새로운 기풍을 주도한 학자는 이간(李柬)[1677~1727]이다.

[아산 성리학의 시작 : 맹희도와 맹사성]

고려의 유학은 중기까지 사장학(詞章學)[문장과 시부(詩賦)를 중요시한 학문] 중심이었다가 고려 후기 성리학(性理學)[인간의 마음인 성(性)과 세상의 이치인 이(理)에 대하여 배우는 학문] 중심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성리학을 중시하는 신진사대부에 의해 조선이 개국하면서 조선의 유학은 성리학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여말선초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이색(李穡)과 권근(權近)이었는데, 맹희도는 이색의 제자이며 권근과 절친으로서 아산 유학을 발전시켰다. 신창맹씨의 후손 맹희도는 1365년(고려 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권근 등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을 익혔다. 또한 최영(崔瑩) 장군의 손녀를 며느리로 맞이하여 최영과도 혼인 관계를 맺었다. 맹희도는 1388년(고려 우왕 14) 명나라 정벌을 나섰던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최영 장군을 제거하자 한산으로 잠시 이주했다가 온양에 정착하였다.

맹희도는 온양 설화산 금곡에 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고려에 대한 충절의 의리를 지켰다. 부모상을 당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삼년상을 치러 효자 정려가 하사되었고, 맹희도의 효행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등재되었다. 맹희도가 온양에 은거한 후 유교 윤리를 실천하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아산 지역에 유학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

맹희도의 아들 맹사성은 어려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아 10살 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侍墓)를 하여 효자 정려를 하사받았다. 맹사성은 효도의 모범적 사례로 선정되어 아버지 맹희도와 함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되었다. 맹사성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권근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이색이 지공거(知貢擧)일 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검열(檢閱), 우헌납(右獻納) 등을 지냈으나 실권자 이성계의 미움을 받아 유배 처분을 받았다.

조선 개국 후 수년이 지난 뒤에 맹사성은 수원부판관(水原府判官)으로 관직에 복직하였다. 이후 예조의랑(禮曹議郞),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공주목사,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조참의,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대에 대사헌을 지낼 때 조대림(趙大臨) 사건을 엄정히 처리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 사형 처분을 받았다. 여러 신하와 왕세자의 간청으로 외방종편(外方從便)[외방의 일정한 곳에 유배]으로 감형되었다가 3년 뒤 관직에 복귀하였다. 이후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으로 태종의 신임을 얻어 이조참판, 예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관습도감(慣習都監) 제조(提調)가 되어 음악을 정비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맹사성은 세종 대에 이조판서,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 등을 거쳐 우의정으로 세종을 보좌하여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업적을 쌓았다. 『시경(詩經)』과 음악에 대한 깊은 조예로 향악(鄕樂)과 아악(雅樂)을 종합한 조선의 음악체계를 정립하는 초석을 쌓았다. 우의정으로 군사를 책임지면서 여진 정벌 작전을 주도하고 성공시킴으로써 세종 대에 4군(郡) 6진(鎭)을 개척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또한 우의정으로 세종을 보좌하면서 대명 외교에서 실리를 추구하여 금과 은, 소와 같은 조공품을 면제받도록 하거나 경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유교적 왕도 정치 이념에 따라 청렴결백한 생활을 하면서 왕에 대한 충간을 통해 민본정치를 구현함으로써 조선시대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이 되었다.

이 밖에도 맹사성은 세종 대에 『경제속육전(經濟續六典)』, 『태종실록』, 『고려사』,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 등의 편찬에 직접 혹은 간접으로 참여하여 학술 문화 진흥에 기여하였다. 특히 『태종실록』 편찬을 주관할 때 세종의 실록 열람 요구를 지혜롭게 거절함으로써 신뢰성 있는 역사 기록의 전통을 수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76세에 좌의정으로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한 후 고향 온양에서 여유로운 말년을 보내다가 1438년(세종 20) 79세로 사망하였다. 재상이었음에도 고향에서 촌로와 다름없이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여 만인의 귀감이 되었다.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즐기는 자신의 삶의 즐거움을 4계절로 나누어 노래로 읊은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사시한정가(四時閑情歌)]」를 남겼다.

[아산 성리학의 발전]

조선 중기 신창표씨 가문의 표연말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과 대제학을 역임하였는데,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표연말의 아들 표빙은 중종 대에 김안국(金安國) 등과 교류하면서 유학의 보급에 힘썼다. 온양에는 온천이 있어 조선 전기부터 행궁(行宮)을 설치하여 6명의 임금이 온천 치료를 하였다. 온양에 머물렀던 임금들은 학덕이 있는 지역 인사들을 선발하여 표창하였고,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들을 선발하였다. 이로 인해 아산 지역 주민들은 문화적 자긍심을 갖고 유교 문화를 발전시켰다.

16세기에는 이색의 후손이며 서경덕(徐敬德)의 제자인 이지함(李之菡)이 아산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유교적 민본정치의 모범을 보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바다에서 왜적을 물리쳤고, 홍가신(洪可臣)은 홍주목사로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렇듯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이순신홍가신 두 명의 일등공신(一等功臣)을 배출한 아산 지역은 구국 충절의 고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7세기에 접어들어 신창의 조익(趙翼), 아산의 박지계(朴知誡)와 홍익현(洪翼賢), 온양의 조상우(趙相禹) 등은 서로 학문적으로 교류하면서 아산에 인산서원(仁山書院), 신창에 도산서원(道山書院), 온양에 정퇴서원(靜退書院)을 건립하고 지역의 청년자제들에게 유학을 교육하였다. 이 가운데 조익박지계는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조익은 재상, 박지계는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아산에서 익힌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중앙에 새로운 문풍(文風)을 일으켰다. 또한 서원 외에도 온양향교, 아산향교, 신창향교의 3개 향교가 관학으로 운용되어 아산의 유교 진흥에 기여하였다. 17세기 아산에서는 학술 교육이 진흥되면서 아산 출신 인사들의 과거 급제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아산 성리학의 개화: 이간]

이간송악면 외암리에서 군수 이태정(李泰貞)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이간외암리에서 생활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일생을 바쳐 한국 성리학 3대 논쟁의 하나인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을 주도하였다. 이간은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거부하고 문장과 경전 공부에 몰두하였으며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적 토론을 즐겼다. 서울의 학자들과도 학문을 논하였는데, 1707년(숙종 33) 권상하(權尙夏)를 스승으로 모시고 활동하면서 호서(湖西) 유학의 대표적 학자로 손꼽히게 되었다.

이간을 비롯하여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채지홍(蔡之洪), 이이근(李頤根), 현상벽(玄尙壁), 최징후(崔徵厚), 성만징(成晩徵) 등 권상하의 문하에서 뛰어난 8명의 학자들을 ‘호중팔학사(湖中八學士)[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고 부른다. 책에 따라서는 성만징·이이근·최징후를 빼고, 한홍조(韓弘祚)·윤혼(尹焜)·신경(申憼)을 넣기도 한다. 따라서 호중팔학사의 명단은 확정된 것이 아니고, 시기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이간은 한원진과 쌍벽을 이루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인성과 물성의 같음과 다름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간은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한원진은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각각 주장하였다. 두 사람의 주장을 둘러싸고 권상하 제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권상하는 이간의 설을 지지하다가 한원진의 설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후 이간의 학설은 호서 지역에서 소외되었는데, 서울과 경기 지역의 학자들이 이간의 학설을 지지하게 되었다.

인성과 물성의 같음을 주장한 이간은 ‘미발심체(未發心體)’는 본래 선하므로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인심(仁心)도 동일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간의 학설은 서울 쪽 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낙론(洛論)’이라고 하고, 한원진의 학설은 호서 쪽 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호론(湖論)’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간과 한원진의 논쟁을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 불렀는데, 호락논쟁은 이후 200년 이상 기호학파(畿湖學派) 내에서 계속되었다.

[외암 사상의 재조명]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이간에 의해 낙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아산 지역이 지닌 역사 문화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아산은 경기도와 충청도의 접경 지역에 있으며, 온양행궁의 존재로 행정적으로는 충청도이지만 나라의 중심이라는 자긍심이 있었다. 또한 수로와 육로를 통해 서울과 경기 지역의 학자들과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이간은 기호학파가 낙론과 호론으로 나뉠 때 지역은 호서이면서 학문적으로는 낙론의 단초를 만드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간으로부터 시작된 낙론을 계승한 학자들 중에 19세기 이후 한국 유학을 발전시키는 학자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19세기 기호학파의 산림(山林)[학식과 덕이 높으나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숨어 지내는 선비]으로 추대된 임헌회(任憲晦)는 아산 염치 출신의 학자였다. 임헌회는 서울의 낙론계 학자인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을 잇는 홍직필(洪直弼)의 제자로 유림의 종장(宗匠)[경학(經學)에 밝고 글을 잘 짓는 사람]으로서 근대의 호서 유학자인 전우(田愚)를 길러냈다.

현상적 차이보다는 본질적 동일성을 중시하는 이간의 인물성동론은 한국 유학의 개혁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홍대용(洪大容)과 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문물도 배우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실학사상을 발전시켰는데, 북학파는 인물성동론을 받아들였다. 북학파의 실학사상은 박규수(朴珪壽)에 의해 개국통상론으로 발전하여 개화사상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듯 19세기 이후 한국 유학의 발전에는 이간의 인물성동론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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