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04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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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聖堂 |
영어의미역 | Catholic Church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구자룡 |
[정의]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천주교의 종교 의식이 행해지는 교당.
[개설]
경기도 부천에 처음 성당이 지어진 것은 1945년 소사성당이 최초이다. 소사에 성당이 지어지기까지는 박해를 피해 부천으로 모여든 치명(致命: 천주와 그 교회를 위해 목숨을 희생함)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의 공이 컸다. 조선의 첫 사제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병오박해 때 현석문·남경문 등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함께 순교하였다. 이즈음 서울 종각 부근에 살던 심락천의 아버지도 천주교 신자라 하여 치명당했다. 그때 심락천은 부인과 함께 처가에 갔었기 때문에 다행히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아버지를 여읜 심락천이 가족을 모두 데리고 선향인 함박리[조선시대에는 인천부에 속해 있다가 1914년에 부천군에 소속됨]로 내려오면서 경기도 부천 지역이 천주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천주교 박해기의 대골공소]
심락천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온 함박리는 현재 ‘함박이’로 불려지는 곳으로, 행정구역으로 경기도 부천시 옥길동에 속해 있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심락천은 아버지가 믿었던 천주학을 버릴 수 없어 가족들과 의논한 끝에 우선 숨어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하기로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옹기골’이었다. 그곳에서 옹기를 구우며 밤이면 가족들을 모아 놓고 몰래 기도하는 신앙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함박리에서 조금 떨어진 대골 방아다리 부근[현재 경기도 시흥시 대야동]에 살던 윤용배는 매일 밤 함박리로 마실을 다니며 심락천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러나 1866년(고종 3) 병인박해로 인해 800여 명의 신자와 7명의 신부가 순교하게 될 때, 경기도 두메산골 함박리 사람들도 박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심락천은 포졸들에게 끌려가 몰매를 맞고 순교했으며, 윤용배와 그의 부인도 어린 아들을 남겨 두고 어디론가 끌려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치명을 당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이들은 분명 부천 지역 최초의 치명자요 순교자라 할 수 있다. 윤용배가 끌려간 후 혼자 남아 있던 어린 아들 윤선기는 이후 고아로 이곳 저곳을 헤매고 다니다 18세가 되던 1881년(고종 18)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 자신의 아버지가 왜 죽임을 당했는지 알게 된 후 천주교 신자가 될 것을 결심했다.
그즈음 대골[지금의 시흥시 대야동 326번지]에서는 정춘화가 회장이 되어 3~4명의 교우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정춘화는 원래 충청도 서산에 살던 사람으로 병인박해를 피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순교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천주교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라 마음먹고 비밀리에 교우의 집에 공소를 설치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교적 가치관에 젖어 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신앙을 심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광경을 보았기에 천주교 교리를 전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선기는 정춘화에게 감화되어, 그 길로 부인과 함께 공소로 찾아가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교리를 배운 지 약 2년여 만에 윤선기는 방지거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받고 치명한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았다. 이후 정춘화는 15년여 동안 맡아오던 공소회장직을 윤선기에게 물려주었다.
대골공소 제2대 회장이 된 윤선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말이 아닌 행동이라 여기고 신자들의 일에 발 벗고 나서며 그 누구보다 공소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 당시 대골공소는 신자라야 10여 명이었는데 정춘화 회장과 그의 아들 정사집, 윤선기 회장과 그의 아들 윤선영 그리고 이귀법, 윤경윤, 이순만, 양문조 등이었다.
1889년(고종 29) 조선 제8대 교구장 뮈델 주교가 치명자 명단을 조사하여 일기를 만들고 있을 무렵, 약현과 종현에 이어 인천 답동에도 성당이 세워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써 소래의 대골공소는 답동 성당[당시 인천 제물포성당] 소속 공소가 되었지만, 교회사 기록에는 대골공소의 설치 연대가 이보다 훨씬 늦은 1902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윤선기 회장은 인천에 성당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 답동 성당을 찾아가 대골공소에 1년에 한 번이라도 신부가 왔으면 좋겠다는 간청을 하였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04년, 답동 성당 제5대 주임인 전학준[으제니오] 신부가 처음으로 대골공소에 머무르며 미사를 집전하였다. 난생 처음 신부를 본 신자들도 있었고, 신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던 사람도 있었던지라 대골공소에는 일대 경사가 났다.
이 무렵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고 윤선기 회장의 희생 봉사 정신에 감화되어 대골에는 천주교를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처음에는 몇 명 안되었던 신자가 이제는 제법 공소에 가득 넘칠 정도였다. 당시 신자 현황을 살펴보면, 1901~1903년에 48명, 1904년에 58명이던 것이 1908년에는 90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08년 대골공소는 인근 동네 새말[현재 시흥시 신천동]에 공소를 분리하였고, 분리된 교인 수는 유아 영세한 어린이 1명과 예비자 1명을 포함하여 모두 44명이었다.
대골공소를 이끌어 오던 윤선기는 1909년 공소회장 자리를 정리하고, 정사집에게 공소 회장직을 물려주었다. 공소 신자들은 윤선기가 회장을 계속하기를 원했으나 너무 회장을 오래해 공소가 침체된 느낌도 들고 젊은 사람에게 물려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결정한 일이었다. 그때 윤선기의 나이 50세였다.
[일제강점기의 대골공소]
1916년 12월 16일 대골공소를 들뜨게 한 일이 있었다. 당시 조선 교구장이었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뮈델 주교가 2박 3일의 예정으로 대골공소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일 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답동 성당의 신부가 오기는 했지만 이런 산골 공소에 주교가 온다는 데에 신자들은 무척 기뻐하였다.
1933년 뮈델 주교 후임에 라리보(A. A. Larriveau) 신부가 부임하였으며, 40여 년 동안 인천 지역 천주교의 요람이었던 제물포성당[현 답동 성당] 개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즈음 대골공소에는 날로 신자들이 늘어갔고, 답동 보좌신부인 임종국 신부가 자주 미사를 집전하였다. 이 소문이 나자, 새말은 물론이고 멀리 소사·장말·고잔·중이 등에서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렇게 되자 대골공소는 공소방이 부족하여 할 수 없이 또 공소를 분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38년 대골공소는 기름장사 전마리아 할머니를 비롯하여 소사읍내에서 대골공소까지 다녔던 교우들 10여 명을 한데 모아 소사공소로 살림을 내주었다. 마땅한 공소방이 없어 전마리아 할머니 집의 방 한 칸을 대신해서 쓰긴 했지만, 공소를 이끌 회장도 없고 예절을 봐주는 신부도 없으니 신자들의 발길이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5년쯤을 전마리아 할머니 혼자 공소를 지키다시피 하였다. 그러다가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공소 신자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회장도 뽑고 공소 자리도 마련하여 신자다운 생활을 하자고 입을 모았다. 신자들의 성의로 모아진 성금은 200여 원으로 당시로서는 적은 돈이 아니었으나 공소를 마련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그러나 몇몇 신자들의 헌신적인 협조로 소사삼거리 부근에 일명 승진고추방앗간 앞집[현재 부천시 소사동 91번지]에 집 한 칸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공백 상태였던 회장도 뽑았는데 윤광교와 박학래가 각각 회장으로 뽑혔다. 공소를 마련한 지 얼마 안 되어 대골공소와 마찬가지로 소사공소에도 답동 성당의 임종국 신부가 봄과 가을에 공소 예절을 봐주었다.
[광복 이후의 소사본당 시기]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그동안 잃어버렸던 조국과 신앙의 자유를 함께 찾은 신자들은 공소 예절만 할 것이 아니라 신부를 모셔와 주일 미사는 물론 매일 미사도 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 정지용이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서울교구 노기남 주교에게 신자들의 뜻을 전달하였다. 뜻밖의 간청서를 받은 노기남 주교는 심사숙고 끝에 순천에서 사목하던 임세빈[요셉] 신부를 임시로 보내기로 하였다.
임세빈 신부를 맞이하게 된 신자들은 이번에는 소사공소를 성당으로 승격시켜 달라고 또 간청하였다. 성당으로 사용할 소림별장[일제강점기 용산공작소장 경태량의 사위 소림의 별장]도 마련해 놓았다. 소사공소 신자들의 열성에 감동한 노기남 주교는 소사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부천 지역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꼭 100년만에 성당이 설립된 것이다.
1945년 소사성당의 초대 주임신부가 된 임세빈 신부는 1946년 우선 주보성인을 ‘본보스꼬’로 정하고 본격적인 사목 활동에 들어갔다.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자 냉담했던 기존의 신자들과 새로 신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성당에 나오기 시작했다. 소사성당이 건립된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 부천에는 17개의 성당이 건립되었고 몇 년 후 4개의 성당이 더 건립될 예정이다. 2004년 12월 24일 세례성사 82명과 첫 영사체 84명이 이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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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4 | 성당 | 1) <소표제>[광복 이후의 소사본당 시기]</소표제> <문단>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그동안 잃어버렸던 조국과 신앙의 자유를 함께 찾은 신자들은 공소 예절만 할 것이 아니라 신부를 모셔와 주일 미사는 물론 매일 미사도 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 <인명 검색='1' UCI='G002+AKS-KHF_13C815C9C0C6A9B1784X0' 검색어='정지용'>정지용</인명>이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서울교구 <인명 검색='0' 검색어=''>노기남</인명> 주교에게 신자들의 뜻을 전달하였다. 뜻밖의 간청서를 받은 <인명 검색='0' 검색어=''>노기남</인명> 주교는 심사숙고 끝에 <지명 검색='0' 검색어=''>순천</지명>에서 사목하던 <인명 검색='1' 검색어='임세빈'>임세빈</인명>(<인명 검색='0' 검색어=''>요셉</인명>) 신부를 임시로 보내기로 하였다.</문단> <문단><인명 검색='1' 검색어='임세빈'>임세빈</인명> 신부를 맞이하게 된 신자들은 이번에는 <기관 검색='0' 검색어=''>소사공소</기관>를 성당으로 승격시켜 달라고 또 간청하였다. 성당으로 사용할 <지명 검색='0' 검색어=''>소림별장</지명>(일제강점기 <지명 검색='0' 검색어=''>용산공작소장</지명> <인명 검색='0' 검색어=''>경태량</인명>의 사위 <인명 검색='0' 검색어=''>소림</인명>의 별장)도 마련해 놓았다. <기관 검색='0' 검색어=''>소사공소</기관> 신자들의 열성에 감동한 <인명 검색='0' 검색어=''>노기남</인명> 주교는 <기관 검색='0' 검색어=''>소사공소</기관>를 본당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 지역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꼭 100년만에 성당이 설립된 것이다.</문단> <문단><기관 검색='1' 검색어='소사성당'>소사성당</기관>의 초대 주임신부가 된 <인명 검색='1' 검색어='임세빈'>임세빈</인명> 신부는 우선 주보성인을 ‘<인명 검색='0' 검색어=''>본보스꼬</인명>’로 정하고 본격적인 사목 활동에 들어갔다.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자 냉담했던 기존의 신자들과 새로 신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성당에 나오기 시작했다. <기관 검색='1' 검색어='소사성당'>소사성당</기관>이 건립된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에는 17개의 성당이 건립되었고 몇 년 후 4개의 성당이 더 건립될 예정이다.</문단> --> <문단>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그동안 잃어버렸던 조국과 신앙의 자유를 함께 찾은 신자들은 공소 예절만 할 것이 아니라 신부를 모셔와 주일 미사는 물론 매일 미사도 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 <인명 검색='1' UCI='G002+AKS-KHF_13C815C9C0C6A9B1784X0' 검색어='정지용'>정지용</인명>이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서울교구 <인명 검색='0' 검색어=''>노기남</인명> 주교에게 신자들의 뜻을 전달하였다. 뜻밖의 간청서를 받은 <인명 검색='0' 검색어=''>노기남</인명> 주교는 심사숙고 끝에 <지명 검색='0' 검색어=''>순천</지명>에서 사목하던 <인명 검색='1' 검색어='임세빈'>임세빈</인명>(<인명 검색='0' 검색어=''>요셉</인명>) 신부를 임시로 보내기로 하였다.</문단> <문단><인명 검색='1' 검색어='임세빈'>임세빈</인명> 신부를 맞이하게 된 신자들은 이번에는 <기관 검색='0' 검색어=''>소사공소</기관>를 성당으로 승격시켜 달라고 또 간청하였다. 성당으로 사용할 <지명 검색='0' 검색어=''>소림별장</지명>(일제강점기 <지명 검색='0' 검색어=''>용산공작소장</지명> <인명 검색='0' 검색어=''>경태량</인명>의 사위 <인명 검색='0' 검색어=''>소림</인명>의 별장)도 마련해 놓았다. <기관 검색='0' 검색어=''>소사공소</기관> 신자들의 열성에 감동한 <인명 검색='0' 검색어=''>노기남</인명> 주교는 <기관 검색='0' 검색어=''>소사공소</기관>를 본당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 지역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꼭 100년만에 성당이 설립된 것이다.</문단> <문단>1945년 <기관 검색='1' 검색어='소사성당'>소사성당</기관>의 초대 주임신부가 된 <인명 검색='1' 검색어='임세빈'>임세빈</인명> 신부는 1946년 우선 주보성인을 ‘<인명 검색='0' 검색어=''>본보스꼬</인명>’로 정하고 본격적인 사목 활동에 들어갔다.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자 냉담했던 기존의 신자들과 새로 신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성당에 나오기 시작했다. <기관 검색='1' 검색어='소사성당'>소사성당</기관>이 건립된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에는 17개의 성당이 건립되었고 몇 년 후 4개의 성당이 더 건립될 예정이다. 2004년 12월 24일 세례성사 82명과 첫 영사체 84명이 이었다.</문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