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08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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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學 |
영어의미역 | Literatur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미영 |
[정의]
경기도 부천 지역에서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언어와 문자로 표현한 예술 및 그 작품.
[개설]
부천 문학은 수주 변영로를 효시로 김영달, 장종태, 최은휴 등을 거치면서 싹트기 시작했고, 1970년대 이석인, 구자룡, 유영자, 이재인, 김정오, 김연식, 이병기가 그 뒤를 이으면서 발전했다. 한국문인협회 부천지부 창립, 부천문우회와 복사골 문학회 창립, 문학동인 등이 발간되면서 부천 문학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
[변천]
1. 부천 문학의 효시
부천 문학의 근원을 알기는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부천은 인천·부평의 일부로 자연 마을이 몇 군데 있었을 뿐 사람이 모여 살던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1899년 일본인들에 의해 경인철도가 부설되어 소사역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역 부근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부천 문학의 효시를 편의상 현대 문학의 출발 시기로 본다면 변영로(卞榮魯)[1897~1961]를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다. 부천시청의 호적을 보면 변영로의 아버지 변정상이 1915년 1월 부천군 오정면 고강리 313번지에 이주해 살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변정상의 셋째 아들 변영로[아명 변영복]는 1897년에 태어나 1958년 6월 10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51-2번지[자하문로23길 3]로 분가하기까지 무려 61년이나 부천에 머물렀던 것으로 되어 있으니 문서상으로는 부천에 퍽 오래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변영로의 호는 수주(樹州)이다. 수주는 고려시대 부천의 이름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1961년 타계한 후에 부천으로 돌아와 묻혔으니 비로소 부천 시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호탕한 기품을 지닌 민족 시인 변영로는 절망적인 암흑 속 조국을 위해 대쪽 같은 절개와 지조를 지켰던 의지의 시인이었다. 고강동 묘소와 부천중앙공원에 변영로의 정신을 기리는 시비가 세워져 있으며, 서울과 부천 경계인 고강동에도 변영로의 동상이 있다.
부천을 사랑하던 시인이 한 사람 더 있다. 바로 소향(素鄕) 이상로(李相魯)[1916~1973]이다. 이상로는 경기도 부천(富川) 소사읍 궁리에서 태어났다. 궁리는 1963년 서울로 편입되면서 궁동이 되었지만 이상로는 분명히 부천 출신의 문인이다. 이상로는 문단에 등단하기 전 언론계에 종사할 때부터 호를 소향이라 했다. ‘소사가 고향’이라는 뜻으로 변영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향을 무척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2. 부천 문학의 발전 및 전개
1960년 드디어 부천에도 문인들이 이주를 해 왔다. 변영로, 이상로 등은 부천과 깊은 인연이 있으면서도 서울에서 활동했던 것과 달리 김영달, 장종태, 최은휴 등은 부천으로 이주를 해와 부천 문학이 싹트는 계기를 마련했다. 인천 문단에서 조병화 등과 함께 동인지 『소택지대』를 주도하고 시집 『여정』을 출간한 김영달이 소사읍 심곡리로 이사를 왔다. 1963년에는 장종태가 부천북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교가도 새로 짓고 동시도 발표했다.
1967년에는 소사읍 구지리에 살면서 언론계에 종사하던 최은휴가 다방에서 시화전을 개최했다. 최은휴가 연 시화전은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복숭아밭에서 복숭아를 가꾸며 농사만 짓던 시골에서 시화전이라는 문학 행사는 생소했기 때문이다. 최은휴는 문학 활동을 여기서 끝내지 않고 그 이듬해 시집 『맹탕헛탕』을 출간하고 출판 기념회까지 열었다. 그 전까지는 부천 사람들이 외지에 나가 문학 활동을 했다면 김영달, 장종태, 최은휴 등은 부천에서 문학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부천도 문학 활동이 가능한 공간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부천에서 문인들이 나름대로 활동을 하고 있을 무렵, 인천에 살던 이석인, 서울에서 정한모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구자룡, 소명여자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수필을 쓰던 유영자, 이재인, 김정오 등이 부천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소래의 김연식, 유한공업고등학교의 이병기가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천의 문학 동인지]
문화 도시 부천에서 발행되는 문학 동인지가 무려 10종이나 되고 서점에서 판매하는 계간지 『시와 동화』도 이곳 부천에서 발행된다. 부천에서 발행된 또는 발행되고 있는 문학 동인지(잡지)를 간략히 표로 정리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문학 속에 나타난 부천]
시인들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하며 시로 쓴다. 대체로 시인들이 출간한 시집을 보면 그 시인이 태어난 곳이 어디쯤인지 짐작이 간다. 적어도 고향을 노래한 시가 한 두 편 정도는 나오기 때문이다. 부천을 대상으로 한 작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변영로의 시, 「고향」
1915년 잡지 『청춘』 14호에 영시 「코스모스」를 발표한 수주 변영로는 천재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평생 많은 시를 발표한다. 그 가운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시가 몇 편 있다.
“여러 해 만에 그립던 고향을/찾았더니 사람도 낯설고/마을 옛 모습 씻은 듯하구나(「고향」의 일부분).”
2. 이상로의 시, 「분이」
소향 이상로는 관념적인 현실 추구와 거기에 곁들인 동양적인 서정과 이상적 미학을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리고 이상로의 고향 생각은 1964년 서울에서 예술인들을 모아 동인지인 『문장가』를 발간할 무렵에도 소사읍 궁리를 잊은 적이 없었다. 이상로는 고향 소사를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길마봉 언저리에 시울 진 놀빛이 아주 산 너머로 스러지는 것을 보자/분이는 누구도 모르게 없어지고 말았다/당아래 고갯길에 산 그림자 가리도록 오늘도 긴 하루를 시름짓던/분이는/눈물은 덧없어라…… /갓 낳은 것 묻은 자리, 상수리 이슬 받는 뒤 산골에서 다시 허리끈을 졸라매었다/삼 년째 신었대야 서슬도 닳지 않은/별표 고무신만이 나란히 놓여있는/무슨 일이 있느냐는 듯이/삽사리 짖지 않는 밤/마을은 메밀꽃으로/ 환하기만 하였다(「분이」 전문).”
3. 구자룡의 『복사골 우리동네』
구자룡은 지옥 같은 서울 생활을 등지고 1970년대 초 부천으로 삶의 둥지를 틀었다. 직장도 부천으로 옮겼다. 도시의 삭막함만 보다가 고향 같은 전원을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구자룡도 역시 부천을 시로 썼다. 그동안 발행한 시집 20여 권을 펼쳐 보면, 구석구석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절함을 부천에서 치유하려는 의지가 역력함을 알 수 있다. 1985년에 출간한 연작 시집 『복사골 우리동네』는 시로 쓴 부천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오랜 시간 동안 부천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집하여 엮은 부천을 사랑하는 대서사 시집이다.
“오늘을 사는/부천의 가슴은 후련합니다/소사인의 가슴은 화평합니다/어제는 눈이 내렸고/오늘은 모든 걸 다 잊고/복사골, 우리 동네/산 따라 길 찾아/괴나리봇짐 얼러 메어 봅니다/옛것 메이고 이지러졌어도/더듬더듬 찾아보렵니다/동국여지승람엔/ 우리 동네 이름도 많습니다/마한시대 우휴모탁국/고구려 때 주부토/신라시대 장제/ 고려시대 수주/조선시대 부평도호부/일제시대 부천군 계남면/해방직후 소사/지금은 부천시/많은 수난을 겪었습니다(『복사골 우리동네』전문).”
양귀자의 연작 소설 『원미동 사람들』이 거둔 문학적 성과는 소시민들의 은밀한 욕구와 충동의 현장을 사실감 있게 그려낸 점에 있다. 실제로 작품 배경이 된 부천시 원미동 64번지[부천로136번길 61-9] 23통과 작가가 살던 11통의 골목은 바로 한 골목을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다. 『원미동 시인』에 나오는 청년이 살던 2층 연립 주택도 ‘행복머리방’ 건너편에 있다. 그 당시 작가 양귀자가 살던 집은 ‘행복머리방’ 2층이고 그 골목에 ‘여주쌀집’이 있다. 23통 골목에 있는 ‘소망슈퍼’에서부터 11통 골목까지 불과 100m가 되지 않는 길이와 폭이 채 4m도 못 되는 공간에서 작가는 원미동을 그렸던 것이다.
“원미동 23통의 모양새를 알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흡사 장 터 객주집의 국자와 같은 꼴이었다. 국자의 손잡이 부분에 원미지물포, 행복사진관, 써니전자, 강남부동산, 우리정육점, 서울미용실 등이 한켠으로 촘촘히 박혀 있고 맞은 편에는 강노인이 푸성귀를 일궈먹는 밭과 무궁화연립 그리고 김반장의 형제슈퍼가 자리 잡고 있었다(『원미동 사람들』 일부분).”
원미동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멀고도 아름다운 동네’라는 뜻이다. 옛날 소사읍 시절만 하더라도 조종리라고 불렀다. 조종리는 우리말로 ‘해 뜨는 언덕’인 ‘조마루’를 일본인들이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해방 후 기준으로 75가구 정도가 살았는데 1973년 시로 승격하면서 원미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언미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후 인구가 늘어 1985년 원미1동과 2동으로 나누어졌다. 소설 『원미동 사람들』은 원미동이 무대이며 지금 부천시 구 원미구청 옆 동네이다.
[부천의 문인들]
1. 부천에서 살다간 문인들
부천 문학을 더듬어 가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부천에 살면서 부천을 노래하다 떠난 이들이다. 목일신, 황명, 정득복, 김국태, 김정오, 김연식, 박건웅, 안정효, 이석인, 이재인, 양귀자, 펄 벅 등이 있다.
2. 부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
부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로는 한국문인협회 부천지부 회원들인 이추림, 민경남, 김가배, 김기수, 김철기, 진현주, 김영철, 이서림, 김재숙, 차영숙, 황연옥, 홍옥희, 정명자, 조남숙, 박정자, 박영봉, 서원, 김미숙, 최은휴, 소진섭, 이정홍, 한돈희, 임현기, 김광묵 등이 있다.
복사골 문학회 회원들로는 강영백, 강예숙, 구자룡, 구정혜, 금미자, 김경애, 김도형, 김영달, 김성자, 김승동, 김원준, 김인수, 김정숙, 김효길, 동미경, 박수호, 박용우, 송영심, 신옥란, 송하용, 안금자, 염순자, 오영석, 유경환, 유부식, 유영자, 이건선, 이창원, 이천명, 이훈희, 장재룡, 장종태, 정창배, 조정숙, 최종만, 구효서, 김윤희, 신말수, 유덕희, 이명인, 이수태, 이현숙, 임남택, 장현호, 강정규, 최동심, 문제술, 고정임, 정임숙, 권영미, 김종성, 문영숙, 문현경, 박성순, 사광주, 심정자, 안명숙, 안효인, 오미옥, 유정미, 이선희, 이영희, 최정애, 황정순, 이우숙, 안성원, 이은재, 김봉군, 이병기, 최운선, 민충화 등이 있다.
부천여류문인회 회원들로는 진현주, 박정자, 김가배, 김재숙, 김철기, 송영심, 이서림, 조남숙, 차영숙, 황영옥, 고우련, 김혜자, 박미랑, 유미애, 이은순, 이서언, 정명자, 김미소 등이 있다.
부천시민문학회 회원들로는: 박일환, 김형식, 이은래 등이 있으며, 글벗문학회 회원들로는 김경옥, 이옥래, 김정숙, 이강언, 이현숙, 박자원, 김종숙, 정보숙, 허현아, 김은희, 김현주 등이 있다. 글방아간문학회 회원들로는 김형은, 강명옥, 임은경 등이 있으며, 부천노동자문학회 회원들로는 안기현, 문동만, 윤경상 등이 있다.
이외에 글사랑문학회 회원들로 김혜자, 이은순, 유미애, 박진숙, 고선희, 이화자 등이 잇으며, 부천좋은동화연구회 회원들인 임정자, 박귀영, 이진우, 송은주, 유현선, 윤종희, 정혜윤, 김순남, 이향림, 윤은경, 허난영 등의 많은 문인들이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