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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3129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대/고대
집필자 길경택

[개설]

충주 지역은 우리나라 3대 철산지의 하나로 고대부터 철광산이 개발되어 철광석을 캐고, 쇠를 뽑고 녹이고 두드려 각종 무기나 농구 등의 연모를 만들던 쇠부리업이 발달했던 곳이다. 고대 국가의 힘의 상징인 철을 확보하기 위해 삼국은 공히 충주 지역에 공을 들였으며 충주 지역을 확보한 국가가 항상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충주는 질 좋은 철을 생산하던 자원의 보고였기 때문에 누구나 탐내던 고장이었고 ‘남방의 인후(咽喉)를 질러 막는 곳’이라고 표현한 정인지 말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사통팔달의 요충으로 한반도의 중심이 되었던 고장이다. 철의 산지로 고대와 중세의 역사에 중심이 되었던 우리 고장! 근세에 접어들며 철의 비중이 약화되고 하운(河運)이나 조령·죽령으로 통하던 육상 교통로의 역할도 약화되어 점차 그 기능을 잃어 낙후된 고장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철의 고장으로서의 전통은 결코 약화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현대적으로 표현되는 철의 고장으로서의 상징은 강철 같은 정신력으로 표출될 수 있지 않을까.

대몽항쟁의 전승지로서의 전통은 근대에 이르러 동학으로 표출되고, 임진왜란 때 백기당·조웅·조덕공의 의병 정신은 일제에 맞서는 유인석의 의병 전쟁으로 나타났던 우리 고장이 아니던가. 자원으로서의 철이 아닌, 굳센 강철의 정신력으로 현대에 있어 역사와 문화의 중심 고장으로 새롭게 가꾸어야 할 것이다.

[고대 전쟁에서 철제 무기의 중요성]

충주는 충청북도 내에서는 동북부 지역에 속하는 곳으로 일찍부터 우리나라 3대 철산지의 하나였다. 현재는 모든 철광이 폐광되어 운영되고 있지 않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하여도 대소원면 만정리의 충주철산, 괴산 불정면 관전리의 어래철산, 중앙탑면 창동리창동철산, 충주시 연수동의 연수동 철산, 대소원면 금곡리의 금곡철산 등에서 철광산이 운영되고 있었다.

충주에서는 빈철·납·강철·연철 등이 생산되어 철로 만들 수 있는 모든 도구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고대부터 충주 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물론 충주가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서 언급된 것처럼 ‘한강 상류이어서 물길로 오가기 편하였던’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고대의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철의 주요 산지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고구려·신라·백제의 삼국이 충주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치열한 싸움도 바로 철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대 전투에 있어서 무기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될 만큼 큰 역할을 하였고, 전시에 있어서도 각종 무기류를 비롯한 군수품 공급은 끊임없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때 철광의 존재는 각종의 철제품을 생산하는 노동과 함께 전쟁의 승리를 보장하는 척도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철 생산이 시작된 시기]

충주에서 철이 생산된 것은 철기가 우리나라에 쓰이기 시작한 철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으나, 철기시대의 유적에서 철제품이 출토되기는 하나 생산되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철이 생산되었다는 직접적인 증거 자료는 희박하나 충주 지역을 백제가 선점하였을 때인 근초고왕 무렵 이미 최고 수준의 철기가 제작되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백제 왕이 370년에 일본 왕에게 하사한 일본의 국보 칠지도의 경우 그 생산지가 어디였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4세기 후엽의 첨단 기술을 응용하여 만든 칠지도는 1,500년이 지난 지금도 녹슬어 부서지지 않고 잘 남아 있는데, 이는 당시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반증하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칠지도의 생산지를 곡나철산(谷那鐵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철산이 어디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곡나철산의 위치로 여러 곳을 비정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타당성이 있는 곳 중의 하나가 충주이다. 아직 충주에서 증거 자료가 출토되지 않아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가까운 인근에 있는 진천의 석장리에서는 백제 초기의 야철지가 발굴되어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진천 석장리에서 발굴된 야철 유적에서는 일본의 제련술보다 200년이나 앞서는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진천 석장리 주변에서는 아직 철광산의 흔적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진천 석장리에서는 사철과 철광석이 모두 이용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철광석은 충주 쪽에서 운반된 것으로 추론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충주 근방 어디엔가 칠지도를 만들었던 곡나철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충주의 명현으로 일컬어지는 신라의 대문장가 강수(强首)가 대장간집의 딸과 혼인하였다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고, 고려시대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다인철소의 사람들이 몽고군을 막아내어 익안현으로 승격하였음도 이러한 철의 문화가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건인 것이다.

[철 생산에 적합한 지질 구조]

충주에는 많은 철산지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류면 완오리, 본리, 독동, 금곡 일대와 중앙탑면의 창동, 노은면수룡, 소태면야동, 충주시 연수동 등지가 그 산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충주는 지질 구조 상 옥천지향사에 해당되는데, 이 옥천계의 변성퇴적암은 충주 부근에서 남서 방향으로 옥천을 지나 익산 북쪽 약 15㎞까지 띠 모양으로 길게 분포하고 있다. 조선계층은 고생대층으로 수안보 부근을 기점으로 발달되어 제천, 단양을 지나 강원도의 영월, 삼척 등지에 분포하는 데 회백색규암과 석영편암 그리고 석회암층으로 구성된다.

한국지질도 충주도폭에 의하면 옥천계층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나 시대 미상의 변성퇴적층 가운데 계명산층에서 철광상이 주로 분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계명산층은 옥천계에 비하여 변질도가 높으며, 옥천계 지층에서는 철광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별되는 것으로 보았다. 계명산층은 다시 계명산대와 중앙대(달천~음성천), 서부대(음성천 서부)로 구분되는데, 3곳에서 모두 자철광과 적철광의 광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된다.

[쇠부리 유물과 쇠부리 유적]

충주 지역에서의 철에 대한 관심은 충주 철조여래좌상(보물 제98호),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512호),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등 철불 3구가 있어 일찍부터 주목되어왔다. 그러나 이에 대한 조사는 1977년 발행한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유적총람』상에 이류면 본리 용광로지에 대한 언급이 있던 것이 처음이다.

충주 지역에서 야철지에 대한 조사는 1991년 충주산업대학교 박물관에서 처음 시작하였다. 충주산업대학교가 위치한 이류면[현 대소원면] 일대를 조사하여 야철지의 존재를 보고하였고, 다시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중부내륙고속국도 건설 예정지에 대한 조사 중 이류면 야철지를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1995~1996년 충주박물관에서 실시하여 『충주 이류면 야철유적 지표조사보고서』를 간행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충주박물관과 중앙과학관 조사팀에서 1998년 충주 완오리 야철 유적을 발굴 조사하였고, 중원문화재연구원 조사팀이 2006년 칠금동 탄금대 주변에서 삼국시대 야철 유적을 발굴하였다. 또 2006년 이후 충주첨단지방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대소원면 일대에서 야철 유적이 조사되고 있어 새로운 자료의 축적이 기대된다.

1. 쇠부리 유적

현재까지 충주 지역에서 야철 유적으로 조사된 곳은 모두 78개 소이다. 이 가운데 발굴된 유적은 완오리 유적과 칠금동 유적, 탄금대 토성 유적, 창동 쇠꼬지 야철지, 가르멜(1) 야철지, 깃대뿔 야철지 등 6곳이고, 일부가 충주첨단지방산업단지 조성 공사 등으로 발굴 조사 중에 있으며 나머지는 지표 조사만 된 상태이다. 칠금동을 포함하여 6개 읍·면·동 지역에서 확인된 것인데 계속해서 추가 조사될 것으로 생각된다.

2. 쇠부리 유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14의 충주목 토산조의 첫머리에도 충주에서 산출되는 토산품 중에서 으뜸으로 철이 꼽히고 있음을 본다. 충주의 철은 실제로 대몽항쟁이 진행되던 시기에 일반 생활 도구 이외에 각종 무기류의 제작 및 공급에 사용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고려시대 최자가 쓴 『삼도부(三都賦)』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중원과 대령(지금의 황해도 해주)의 철은 빈철, 납, 강철, 연철을 내는데 바위를 뚫지 않아도 산의 골수처럼 흘러나와 뿌리와 그루를 찍고 파내되 무진장 끝이 없네. 홍로에 녹여 부으니 녹은 쇠가 물이 되어 불꽃에 달군 양문, 물에 담군 음문을 대장장이 망치 잡아 백번 단련하니 큰 살촉, 작은 살촉, 창도 되고 갑옷도 되고, 칼도 되고 긴 창도 되고, 화살도 되고 작은 창도 되며, 호미도 되고 괭이도 되며, 솥도 되고 물통도 되니, 그릇으로는 집안에서 쓰고 병기로는 전쟁에 쓰네.”라고 읊고 있다.

여기에서 무기류가 농기구보다 훨씬 강조된 것을 보면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고, 실제로 다인철소(지금의 대소원면)에서는 철소민(鐵所民)들이 몽고 침략에 대대적인 항전을 전개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철소민들의 승리의 주된 원인은 이곳 사람들의 용맹에도 있겠지만 몽고군들보다 월등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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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지역의 야철지

[철제 무기 사용 사례들]

1. 충주민의 대몽항전

충주는 고려의 대몽항전사에 있어서 가장 주목받는 지역이다. 항전의 외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대몽항전의 가장 의미 깊은 사례들이 풍부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충주 지역에는 개전 이래 종전까지 많은 항전 사례가 기록으로 전해온다. 그 가운데 1231년 노군·잡류별초(奴軍·雜類別抄)의 항전, 1253년 충주성 항전, 다인철소민 항전은 충주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대몽항전사에 있어서 충주민의 항쟁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여러 측면에서 들 수 있다. 첫째, 철저히 충주 지역민이 주체가 된 항전이었다는 것이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들은 1253년 방호별감 김윤후를 제외하면 실제 전투에서 지도 능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였다. 둘째, 농민·노비와 같은 하층민의 역할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1231년 충주성에서의 노군·잡류별초의 항전, 1253년 충주산성 전투에서 관노들의 역할, 1254년 다인철소민의 항전 등은 충주민의 항전에서 천민 계층을 포함한 피지배 민중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셋째, 지역민의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행정구역의 승격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항몽전쟁의 과정에서 지방민들의 집단적 공적을 포상하는 한 방법으로 해당 지역의 행정구역을 승격시키는 사례는 정부에 의해 간혹 시행된 적이 있었다. 가령 1231년(고종 18) 3개월에 걸친 몽고군의 파상적 공세를 끝까지 막아내었던 대몽 1차 전쟁 최대의 격전지 귀주(龜州)를 정원대도호부(定遠大都護府)로 승격시킨 것, 1232년(고종 19) 적장 살례탑을 사살하여 2차 침략군을 철퇴케 하였던 처인부곡(處仁部曲)을 처인현으로 승격시킨 경우가 그것이다. 이들 사례는 모두 고려의 대표적 항몽전의 사례에 해당한다.

충주 지역의 경우, 1253년 70여 일의 사력을 다한 항전으로 5차 몽고 침략군을 철퇴케 하였던 충주를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시킨 것, 충주 다인철소익안현으로 승격시킨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행정구역의 위계를 승격시킨 경우는 실제 더 많이 있었을 것이나, 기록상으로는 충주 지역을 포함하여 4개에 불과하다. 그 중 2개가 충주의 경우에 해당한다. 충주와 익안은 바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철을 이용한 병기를 사용하였을 것이고 그것이 승리의 밑거름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분명하다고 하겠다.

2. 진흥왕국원성 점령

이중환이 『택리지(擇里志)』에서 언급하였듯이 “이곳은 경기도와 영남을 왕래하는 요충지이므로 유사 시에는 반드시 전장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들지 않아도 충주의 여러 조건들은 삼국의 각축장이 되기에 충분했다. 고구려·백제·신라는 중원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피나는 싸움을 벌였다. 이는 한강 유역을 장악해야만 한반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지정학적인 이치 때문이었다.

삼국 중 충주 지역을 최초로 지배한 나라는 백제였다. 충청 지역이 본래 마한의 옛 터였기에 초기 백제의 세력권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誌)』에는 충주를 백제시대에 낭자곡성(娘子谷城)이라 했고, 또한 미을성(未乙省)·낭자성(娘子城)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가 충주를 지배한 시기는 5세기 중반까지 약 400년간으로, 이 시기 동안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하고 해외 진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광개토대왕 때 북방 진출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고구려가 충주 지방을 장악한 것은 장수왕 때인 475년에서 491년경으로 생각된다. 당시 충주를 장악한 고구려는 이곳을 ‘국원성(國原城)’이라 했다. 국원이란 ‘나라의 근원이 되는 땅’ 내지는 ‘나라의 처음, 본디가 되는 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충주 지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국원성을 남방 진출의 전진 기지로 삼으며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구축하게 된다.

그러나 고구려가 충주를 지배한 기간은 551년 신라의 진흥왕에 의해 완전 복속되기까지 약 60~70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이를 기념하고 상징하는 비를 세웠는데, 그 비가 바로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인 것이다. 충주 고구려비는 1979년 충주의 향토사 연구 단체인 예성동호회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고구려는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중원 지방에 그 흔적을 뚜렷이 남기고 있다. 충주 장미산성·건흥5년명 금동불입상·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등과 같은 문화재를 남긴 것이다.

신라가 충주 지역에 들어온 것은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대비해 백제와 연합을 시도하고 고토 회복 작전을 펴는 548년부터 551년 사이로 추정된다. 신라는 죽령을 넘어 단양의 적성산성으로 진격해 한강 상류를 확보하고, 그 여세를 몰아 한강 하류 지역까지 점령하는 큰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의 증거물로 신라는 단양의 적성산성에 야이차(也爾次)의 공을 치하하는 단양신라적성비(국보 제198호)를 남겼다. 551년에는 진흥왕이 충주 탄금대 근방 하림궁을 순수(巡狩)할 때 우륵을 불러 가야금을 연주케 하며, 계고·법지·만덕 등의 제자를 기르도록 했다.

557년에 국원을 소경(小京)으로 승격시켜 ‘국원소경’이라 하고, 다음 해에는 귀족 자제들과 6부의 호민을 국원에 옮겨 살도록 했는데, 충주의 중앙탑면 누암리에 그 증거가 있다. 누암리에는 경주에서나 볼 수 있는 동산만한 고분이 많은데, 바로 신라 귀족의 무덤이다. 충주 누암리 고분군에서는 금귀고리 등의 금붙이와 각종 토기류가 발굴되었다. 특히 단각고배(短角高杯)는 6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대표적 신라 유물로 이 고분군의 시대와 성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통일신라시대에 충주는 왕경인 경주에 버금가는 정치·문화·군사의 중심지였다. 고구려가 충주 지역을 남진 기지로 삼았던 것과 같이 신라는 이곳을 삼한일통정책(三韓一統政策)을 수행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보통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나라가 한반도를 지배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많은 경우 그 한강 유역을 지금의 서울을 가리키는 말인 양 생각한다. 그러나 고대 국가에서는 강력한 무기를 가진 집단이 정복 국가가 되어 큰 힘을 떨쳤다는 점을 감안하여 무기를 생산하는 곳을 장악하는 나라가 전체를 지배한다는 말로 바꾸어 본다면 과연 지금의 서울을 지칭하는 말일까?

더욱이 옛날부터 중원 땅은 수로와 육로가 발달되어 있던 교통의 요지였다. 사통팔달의 대로가 뚫려 있기에 이곳을 장악하면 곧 중부 지방 전역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이렇기에 신라 진흥왕이 죽령을 넘어 적성(단양)과 중원을 장악하고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것과 조선의 선조가 충주의 패전 소식에 곧바로 피난을 떠난 것, 한말 유인석의 의병이 충주성을 점령했을 때 전국의 모든 국민이 기뻐한 사실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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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지역 대몽항전 사례

[쇠부리 기술의 총아, 철불]

충주가 철의 고장임을 증명하는 뚜렷한 증거물은 이 지역에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철제 불상 3구이다. 충주 대원사에 위치한 충주 철조여래좌상(보물 제98호)과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512호), 엄정 백운암의 주존불로 안치된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보물 제1527호) 등 현재까지 발견된 20여 개의 철불들 중 충주에서만 3구가 있다는 사실은 이 고장이 철의 산지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대원사의 충주 철조여래좌상은 광불거리에 있던 것을 충주 관아에 안치하였다가 근년에 대원사 경내로 옮긴 것인데 고려시대 밀교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불상이다. 철불의 모습은 큼직한 나발의 머리에 뚜렷이 육계가 표현되었으며, 반개한 양눈 사이에는 백호공이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통견의 법의엔 V자형 의문이 돌려 있고 가슴에는 군의의 결대가 보인다. 수인은 두 손이 모두 결실되어 확인할 수 없으나 무릎 부분이 동체에 비하여 넓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은 충주 철불좌상과 동일한 장인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일 만큼 전체적으로 주는 느낌이 동일하다. 다만 백호가 남아 있고, 가슴 앞에서의 옷 무늬의 처리가 대원사의 것이 3돌 줄기의 U자형을 이루는데 비하여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은 6줄로 표현되는 등 몇 가지 작은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충주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도 역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대원사단호사의 철불보다는 전체적인 모습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나 먼저 제작된 것으로 고려 초기에 유행하던 고려 철불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충주 지방에 전하는 이 3구의 철불은 후삼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등장한 고려의 신흥 세력들에 의해 유행처럼 만들어진 것이겠으나, 충주 지역의 자원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였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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