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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675
한자 金石文
영어음역 Geumseongmun
영어의미역 Epigraph|Metal and Stone Inscription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집필자 남권희

[정의]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 전해지는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문자.

[개설]

금석문(金石文)은 철(鐵)이나 동(銅)과 같은 금속성 재료에 기록한 금문(金文)과 석재(石材)에 기록한 석문(石文)을 합하여 이르는 말이다. 넓게는 토기에 기록한 명문(銘文), 목간(木簡)에 기록한 묵서, 직물에 쓴 포기(布記), 칠기(漆器)에 기록한 묵서, 기와의 명문 등을 포괄하기도 한다. 다만, 짐승의 등껍질이나 뼈에 기록한 갑골문, 금속 화폐에 주조한 명문 등은 금석문에서 제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역사 연구에서 당대 자료와 후대 자료의 구분이 중요한데 당대 자료는 1차 자료로 그 만큼 사료적 가치가 높으며, 후대 자료는 2차 자료로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약간의 왜곡과 변화가 있을 수 있다. 금석문은 당시의 사람들이 직접 남긴 1차 자료로 역사 연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용]

김천 지역에 소재하거나 김천 지역에서 출토된 신도비(神道碑), 정려비(旌閭碑), 묘비(墓碑), 탑기 등은 17개 정도이다. 배흥립 신도비(裵興立神道碑), 김굉 묘비(金宏墓碑), 이경재 백세 불망비(李景在百世不忘碑), 유주목 묘갈(柳疇睦墓碣), 김득배 제단비(金得培 祭壇碑), 홍우룡 선정비(洪祐龍善政碑), 박홍발 유허비(朴鴻發遺墟碑), 강우창 정려비(姜遇昌旌閭碑), 김용욱 처 묘비(金容旭妻墓碑), 이약동 유허비(李約東遺墟碑), 갈항사비(葛項寺碑), 시장군비(柴將軍碑), 갈항사 석탑기(葛項寺石塔記), 직지사 사적비(直指寺事蹟碑), 직지사 추담 대사비(直指寺秋潭大師碑), 백촌 김선생 원허비(白村金先生院墟碑), 김굉묘비(金宏墓碑) 등이 있다.

배흥립 신도비는 1699년(숙종 25)에 세워진 것으로, 지은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 강백년(姜栢年)[1603~1681]이고, 글씨를 쓴 사람은 배정휘(裵正徽)[1645~?]이며, 글을 새긴 사람은 허목(許穆)[1595~1682]이다. 배흥립(裵興立)[1546~1608]의 자는 백기(伯起), 시호는 효숙(孝肅)이며,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이순신의 휘하에서 전부장(前部將)으로 참전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칠천량(漆川粱)·노량(露梁) 해전에 조방장(助防將)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배흥립의 선조들을 먼저 이야기하고, 이어서 배흥립의 착한 성품에 대해 일화를 들어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함께 큰 공을 세웠던 과거의 관직 생활을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배흥립의 신도비는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황새마을에서 출토되었으며, 배흥립 장군을 모신 사당인 삼강사(三綱祠)에서 신주를 모시고 있다.

갈항사 석탑기는 8세기 후반 이후에 새겨진 기문으로 추정되며,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리 소재의 쌍탑을 1916년에 경복궁으로 옮길 때에 발견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갈항사는 승려 승전(勝詮)이 상주(尙州) 개녕군(開寧郡)에 정사를 짓고 개창한 절로 승전은 중국 당나라의 승려 법장에게 화엄을 배웠다. 쌍탑 중 동탑 상층 기단의 면석에 행서로 쓴 ‘갈항사 석탑기’가 새겨져 있다. 현재 탑은 경복궁에 있고, 탑에서 출토된 사리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직지사 추담 대사비추담선사(秋潭禪師) 관징(琯澄)[1702~1778]의 비문이다. 스님의 법명은 관징, 법호는 추담으로 1702년(숙종 28) 김산 위동리에서 출생하였다. 13세에 뇌원(雷遠)에게 출가하고 원공(圓空)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운암(雲岩) 스님의 법을 이어갔다. 1733년(영조 9)에 강사로 이름을 떨치고 여러 차례 표충사 좌장에 올랐으며, 1778년(정조 2) 직지사 명적암에서 시적(示寂)하였다. 비의 앞면에는 관징의 행장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관징의 제자와 비의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추담 대사비관징이 입적한 후 1787년(정조 11)에 승려 총화(摠華)가 강항(姜杭)에게 글을 짓게 하고 강세백(姜世白)이 글씨와 전액을 받아 건립하였다.

[의의와 평가]

금석문은 1차 자료로 글을 쓴 당대의 정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역사 연구에 있어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위의 자료는 김천 지역과 관련된 인물들의 행적과 업적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어 당대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천시사』(김천시, 1999)
  •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
  • 직지성보박물관(http://www.jikji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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