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5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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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樂生場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강병수 |
[정의]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부(군)에 개설되었던 향시(鄕市)의 하나.
[개설]
지방에서 개시되는 시장을 장문(場門) 또는 상시(上市)라고도 하였다. 그러므로 분당장문 또는 분당상시라고 불려졌을 것으로 생각되나 분당장의 현재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15세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지방의 향시는 16세기에 보편화되어 전국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조선 중기부터 정비된 면리제로 인해 낙생면도 16세기말의 읍지에 상세히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낙생장도 16세기 말이나 17세기 초에는 확실히 형성되었을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이 당시 농민들은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생산고의 증대, 농업경영의 발전, 상업적 농업생산 발달 등에 따른 부의 축적은 교환경제로 나아가게 하는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내용]
조선 후기가 되면서 농업생산력이 크게 발달한데다 대동법 실시 이후에는 공인(貢人)이라는 국가에서 공인한 상품유통기구가 확립됨에 따라 상업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각 지방의 장시나 우수한 물건의 생산지는 공인들의 구매시장으로 되어갔고, 이에 따라 여러 물건을 대량으로 취급하는 사상들이 등장하였다. 이들 사상의 성장은 전국적인 장시의 발달에 토대를 둔 것이다.
18세기 중기에 전국의 장시는 1,000여개소가 넘을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 이는 대개 5일장이었으며, 하루 왕래가 가능한 30리~40리(약 4㎞)의 거리를 표준으로 시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19세기 중기 성남지역 내의 장시로는 남한산성 내의 성내장(城內場)과 낙생장이 개시되었다. 성내장은 매달 2일과 7일에, 낙생장은 3일과 8일에 열리는 5일장이었다. 각 장의 장세(場稅) 수입은 국가에서 거둬들였는데, 낙생장은 현절사(顯節祠)에서 거둬들였다.
이 지역에서는 특산물이나 우수한 물품 생산이 별반 없어서 낙생시장에서는 한성에서 필요한 땔나무와 잡곡 정도, 그리고 수공업 제품의 일부를 내다 팔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시장의 대장간에서는 괭이, 호미, 낫 등의 농기구를 제조하여 판매하였을 것으로도 짐작된다.
[의의]
기록에 의하면 성남지역에도 18세기 중기부터는 지방의 향토시장이 열렸다. 낙생장도 19세기 중대의 기록에 정확히 나타나지만 그 이전부터 이 지역 농민들의 생활필수품들을 교환하는 향시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왕성한 시장활동이 전개됨으로써 시장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에 따라 장세(場稅)를 국가에 바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