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2200
한자 安東布
영어음역 Andongpo
영어의미역 Andong Hemp Cloth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희진

[개설]

안동 지역에서 생산되는 삼베 가운데 익히지 않은 생냉이로 짠 것을 일컬어 안동포라고 한다. 삼베는 대마의 껍질을 다루는 방법에 따라 생냉이, 익냉이, 무삼으로 나뉘는데 이 중 가장 부드럽고 고운 것을 생냉이라고 한다. 그다음 등급이 익냉이이며 가장 거칠고 억센 것이 무삼이다.

품질 좋은 안동포는 대개 생냉이이며 80올 1새를 기준으로 했을 때, 15새까지 직조가 가능했다고 하나 현재는 8새 정도면 비교적 상품(上品)으로 친다. 안동포는 주로 여름용 옷감인 모시와 함께 사용되었으며 올이 굵고 거친 것은 상복(喪服)으로 쓰였고, 유교적 전통이 강한 안동에서 사대부 남성들의 도포를 만드는 데도 쓰였다. 최근에는 수의용(壽衣用) 옷감으로 많이 쓰인다.

[안동포 직조 기술의 전승]

안동포 생산은 현재 임하면 금소리·고곡리, 북후면 옹천리, 서후면 저전리·대두서리, 풍산읍 서미리, 안동시 무주무(수상2동, 수하1동, 수하2동)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공통 작업이 필요한 삼베길쌈의 특성상 주로 조직적인 노동력 동원이 가능한 동성마을 등에서 더욱 활성화되어 지속적으로 전승되는 양상을 보인다.

1970년대 이후 대마 재배가 허가제로 변경된 후 대마 경작에서 직조까지 삼베길쌈의 생산과 관련된 전 과정을 수행할 수 있는 마을은 금소리고곡리뿐이며 나머지 마을은 대마를 구입하여 직조만 하고 있다. 1975년 ‘안동포짜기’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면서, 금소리에 사는 배분령 할머니가 기능보유자로 선정되었다.

[안동포 직조 과정과 특징]

3월에 대마를 파종하고 재배하여 6월쯤 수확한 뒤 겉껍질을 벗겨내기 위해 찌는 과정을 거친다. 이것을 ‘삼굿’이라고 하는데 물가에 인공적으로 만든 구덩이에 돌을 넣고 달구면, 연결된 다른 구덩이 쪽으로 뜨거운 김이 전달되어 찌는 원리다. 이렇게 쪄낸 대마는 하루 정도 말렸다가 다시 물에 불려 껍질이 분리되기 쉬운 상태로 만든다.

이 과정이 안동포가 다른 삼베와 구분되는 점이다. 대마를 잿물에 익혀서 베를 짜면 익냉이가 되는데, 안동포는 이 과정을 생략하고 물에 담가 불려 익히는 방식을 택한다. 껍질을 속대로부터 분리한 뒤에는 삼톱으로 겉껍질을 훑어내려 속껍질을 얻는다. 생냉이는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삼톱으로 또 한 번 껍질을 분리하는 것이므로 익냉이보다 얇고 가느다란 섬유를 얻을 수 있다.

겉껍질을 제거한 속껍질을 모아 햇볕에 말리는데, 이것은 색을 바래게 하는 과정으로 ‘제추리’ 또는 ‘계추리 바래기’라고 부른다. 이 과정이 끝나면 삼을 가닥가닥 찢는 ‘째기’가 이어지며 이때 안동포의 새수가 결정된다. 찢은 삼을 모아 잇는 과정은 ‘삼 삼기’라고 하며 올과 올을 연결하여 긴 실을 만든다. 생냉이는 날실을 비빈 뒤 꼬아 삼기 때문에 삼을 꼬아 실의 강도를 강화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실이 모두 마련되면 씨실을 북에 감아 씨실꾸리를 만들고 길이와 새수를 고려하여 날실의 길이와 올수를 결정하는 ‘베날기’를 한다. 베날기가 끝나면 마당에서 겻불을 피워 두고 날실에 풀을 발라 입히는 ‘베매기’를 하여 베를 짜는 동안 날실이 건조되어 끊어지지 않도록 준비한다. 베짜기가 모두 끝나면 물에 담가 풀기를 제거한다.

생냉이인 안동포는 잿물에 익히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으므로 삼베를 완전히 직조한 이후에 별도로 균질한 색을 내도록 하는 과정인 ‘상괴내기’가 필요하다. 상괴내기는 균일한 색을 얻기 위해 잿물에 담갔다가 뜨거운 방에 넣어 두고 3일이 지난 뒤에 꺼내는 과정이다. 안동포의 특성은 생냉이로 생산되는 방식에 있으며 이것이 여타 지역에서 생산되는 익냉이에 비해 훨씬 우수한 품질의 삼베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안동포에 관한 기록]

19세기 전반에 저술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예규지(倪圭志)」 ‘팔역장시조(八域場市條)’에는 면포(綿布), 단주(緞紬)와 더불어 마포(麻布)가 안동장에 풍부한 물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안동포’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문헌은 19세기 전기 헌종 대의 「한양가(漢陽歌)」이다. 베전에 놓인 여러 가지 삼베 가운데서 안동포라는 명칭을 찾아볼 수 있다.

1892년(고종 29)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화군(義和君)의 관례(冠禮) 때 장만한 의복의 종류와 가짓수를 기록한 「발기」에 ‘안동포 고의’가 기록되어 있다. 1911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발간한 『조선산업지(朝鮮産業誌)』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특용작물로 대마가 있으며, 경상도 안동 부근의 생산량이 약간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5년 일본인의 조사 보고서 『조선향염직물각칭류휘』의 ‘마(麻)’ 항에 안동포가 기록되어 있으며, 1924년 조선총독부 촉탁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가 조사하여 펴낸 『조선의 시장[朝鮮の市場]』에는 안동장에 출하된 마포의 양이 4,500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910년 안동군 전역의 마포 생산량이 11,230필인 것과 비교했을 때, 현격한 생산량 증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1926년에 발간된 『시장지의 상권[市街地の商圈]』과 1927년에 발간된 『조선의 물산(朝鮮の物産)』에도 안동 특산물로 마포가 기록되어 있다. 이능화(李能和) 역시 1927년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에서 여름철 옷감으로 안동포를 소개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안동포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대략 19세기 후반 무렵이며, 20세기 초에 이르러 비로소 좋은 품질의 삼베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동마포조합]

1913년 국담(菊潭) 권태연(權台淵, 1880~1947)에 의해 설립된 안동포 중개 및 기술개량조합이다. 1931년 간행된 『안동군세일반(安東郡勢一斑)』에 따르면, 설립 당시 안동마포개량동업조합으로 개소했다가 「동업조합령」에 저촉되어 1920년에 안동마포조합으로 개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동마포조합은 안동포 개량은 물론 다른 지역의 삼베 생산에도 계도적 영향을 미쳤으며, 각 지역 안동포의 위상을 알리는 계기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물산』에는 “경상북도 안동군에서는 각지의 상인이 (안동포) 생산 기간 동안 읍내에 와서 수십 일간 체류하면서, 마포조합의 중개에 의하여 매일 모여드는 생산자에 따라 소요 수량의 마포를 구입하여 대구나 기타 시장에 반출하여 판매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안동마포조합이 안동포 판매 중개와 외부 판로 개척까지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동포 도포의 기능]

도포는 조선시대 사대부가(士大夫家) 남성들의 일상용 겉옷으로 1884년(고종 21) 「갑신의복개혁령」 이후 포제가 바뀌고 신분적 구별 없이 두루마기를 착용하게 되면서 의례복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또한 다른 지역에 비해 유교적 전통이 더욱 강력하게 지속된 안동의 지역적 특성과 관념에 따라 각종 유교 의례를 수행하는 빈도가 줄지 않으면서 의례복으로서 도포의 역할도 지속되었다.

안동 지역에서 도포를 착용할 수 있다는 것은 한 가문의 남성 구성원으로서 유교적 의례를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각종 대소사나 제례 때에는 반드시 도포를 착용하였고 삶을 마감한 뒤에는 수의로 활용하였다. 사대부가의 남성들에게 도포는 살아서는 자신의 사회적·신분적 위치를 보여 주는 것이었고,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도 예를 갖추기 위해 사용된 필수품이었다.

아울러 예단으로 시아버지의 안동포 도포를 마련하는 것은 안동 지역 인근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었다. 여성이 도포를 만드는 것 또는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바느질 솜씨’를 판가름하는 일인 동시에 여성 자신이 속한 집안의 사회적 위치를 보여 주는 것이었으며, 유교적 규범을 엄격히 수행하는 집안의 자손임을 표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유교적 색채가 강한 안동 인근 지역에서 안동포 도포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산물인 동시에 사회적 특권의 표시이자 지위의 상징이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