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0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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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선사/선사,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배성수 |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경기도 부천시의 역사.
[개설]
부천시는 한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에 인접해 있다. 동쪽과 북쪽은 서울특별시 강서구·양천구·구로구와 닿고, 남쪽은 경기도 시흥시·광명시와 경계하며, 서남쪽은 인천광역시 계양구·부평구 및 남동구와 접한다. 한강 하류에 인접하여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시대 이후 지금까지 수도의 주변지로서 기능하고 있다. 한강을 기준으로 남과 북의 문화가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하며, 특히 조선 시대에는 서울에서 강화와 인천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과 문물이 왕래하였다.
[선사 시대]
부천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구석기 시대 유적과 신석기 시대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근 지역인 시흥시 계수동과 목감동 등에서 다각면 원구와 몸돌 등의 구석기 시대 석기가 발견되었으며, 부천의 고강동에서도 다각면 원구가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볼 때 향후 부천에서 구석기 시대 유적과 신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부천 지역의 대표적인 선사 유적으로는 고강동의 청동기 시대 유적이 있다. 고강동 선사 유적은 1995년 여름 홍수 때 유물이 드러나면서 발견된 유적으로 반달 돌칼과 석창 등 매우 정교하게 가공된 석기들이 부천시에 신고되어 알려졌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7차에 걸쳐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총 21기의 청동기 시대 주거지와 제사 유적인 적석 환구 유구가 확인되었다. 특히 제4차 조사에서 확인된 적석 환구 유구는 발굴 조사 당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청동기 시대 제사 유구로 당시의 제사 의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고강동 선사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민무늬 토기와 간 석기류 등은 청동기 시대뿐 아니라 초기 철기 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어 한강 유역의 초기 국가 단계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였다.
[고대]
현전하는 문헌들에서는 부천의 역사를 대체로 고구려 시대부터 기술하고 있다. 지금의 부천 지역을 포함하는 전통 시대 부평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한 각종 사서에 고구려의 주부토(主夫吐)로 기록되어 있다. 주부토는 문헌에 나타나는 부천 지역에 대한 최초의 지명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삼한 시대 마한 54 소국의 하나인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을 부천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주부토는 고구려의 지명으로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되었던 시기는 475년(장수왕 63)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일대를 차지한 때로 보인다. 그 이전에 이 지역은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인근 지역인 인천의 옛이름이 백제의 미추홀이었던 것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누리다 6세기 들어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는 등 정치적 불안이 거듭되었다. 이때를 틈타 백제와 신라가 551년(진흥왕 12) 한강 유역을 공격하여 부천 일대 한강 하류 지역은 백제가, 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가 분할 점령하였다. 553년 신라는 한강 하류 지역을 급습하여 백제군을 몰아내고 한강 유역 전체를 독점하였다. 부천은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 후에도 여전히 주부토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부천이 당시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음에도 757년(경덕왕 16) 장제군(長堤郡)으로 개명되기까지 이 지역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팽창된 영토와 늘어난 인구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687년(신문왕 7) 전국을 9개 주로 나누고 지방 거점 5곳에 소경을 설치하여 9주 5소경제를 완성하였다. 또 757년(경덕왕 16)에는 한화 정책(漢化政策)을 시행하면서 그 작업의 일환으로 전통적인 지명들을 그 음이나 뜻에 의거하여 모두 한자식으로 변경하고, 주·군·현 간의 영속 관계를 정비하여 지방 제도를 더욱 조직화하려고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부토군도 장제군이라는 한자식 지명으로 변화되었다.
삼국 통일 후 한동안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라는 경덕왕(景德王) 대를 고비로 점차 붕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9세기 말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각각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움으로써 마침내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 궁예는 강원도 지역을 기반으로 점차 한강 이남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898년(효공왕 2)에는 공암(孔岩)[현 김포군 양천]·검포(黔浦)[현 김포]·혈구[현 강화] 등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 30여 성을 차지하였다. 검포와 공암은 장제군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장제군도 궁예의 세력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고려 시대]
918년 왕건(王建)은 궁예를 타도하고 고려를 건설한 후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940년(태조 23)에는 전국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지명을 고쳤다. 이때 부천의 지명도 장제군에서 수주(樹州)로 개칭되었다. 이것은 부천의 읍격이 상승한 것을 의미한다. 995년(성종 14) 고려는 지방 제도를 정비하여 전국에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때 수주에도 단련사(團練使)라는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1150년(의종 4) 지명이 수주에서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로 변화되면서 읍격도 상승하였다. 고려 전기의 도호부(都護府)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에 설치되었다. 당시 부천에 안남 도호부를 설치한 것은 12세기 들어 백성들의 유망이 많아지고,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 등 정치적 변란들이 이어지자 수도 개경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후 고려 시대 부천의 지명은 계속 변화하였으며, 읍격 또한 승강을 반복하였다. 1215년(고종 2)에는 안남 도호부에서 계양 도호부(桂陽都護府)로 개칭되었다. 1308년(충렬왕 34)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 다시 부평부(富平府)로 강등되었다.
[조선 시대]
1392년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건국된 조선은 지방의 통치를 체계적으로 정비하기 위해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목(牧)·도호부·군·현 등을 두어 각기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때 부평은 전국 44개 도호부 중 하나로 종 3품 도호 부사가 파견되었다. 당시 부평은 강화와 김포를 거쳐 한성 및 해주와 연결되는 한강 수로에 위치하여 행정 구역상 수원진관에 소속되어 인천을 속읍으로 둔 군사적 요충지였다.
1592년(선조 25)부터 7년간 계속된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전체 지역에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의 제1군은 평안도 방면으로 북상하는 과정에서 5월 19일 부천의 원미산 장대봉에서 항거하는 선거이(宣居怡) 장군을 물리치고, 그날부터 부평읍에 침입하여 계양 산성을 근거지로 삼았다. 당시 부평 부사 남유(南瑜)는 겁에 질려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피신하였다. 계양 산성을 근거지로 한 왜군은 인천을 함락한 후 김포와 통진을 거쳐 개성으로 진격하였다.
조선 시대 부평은 조운 수로의 길목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삼남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운선들은 인천과 부평 연안을 지나 강화도 염하 수로를 거쳐 한강의 마포 나루에서 하역하였다. 그러나 강화도 염하 수로는 물살이 거세어 이곳에서 조운선들이 좌초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 연안에서 한강으로 직접 연결되는 물길을 내 조운선을 운행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는 자연 하천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으로 수로를 내어 물길을 바꾸려는 것이었다.
이 시도는 조선 중종(中宗) 때 김안로(金安老)가 추진하였는데, 인천 연안에서 인천과 부평의 경계인 원통이 고개와 부천을 지나 한강을 연결시키려는 것이었다. 당시 공사는 한강에서 시작하여 원통이 고개까지 수로를 굴착하던 중 중단되었다.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이 고개를 굴착하기가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1876년(고종 13) 조선은 일본과 조일 수호 조규[일명 강화도 조약]를 체결하면서 마침내 개항을 결정하였다. 1883년(고종 20) 인천이 개항함에 따라 부천 지역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종래의 8도를 폐지하고 13부제를 시행하면서 부평은 인천 관찰부에 속한 부평군이 되었다. 그러나 1896년 13도제로 전환함에 따라 경기도에 속한 부평군이 되었다. 당시 부평군은 15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현재의 부천에 해당하는 곳은 상오정면·하오정면·석천면·주화곶면·옥산면의 일부 지역이었다.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많은 외국인과 교역품이 서울로 향하면서 그 길목에 해당하는 부천에도 변화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특히 1899년(고종 36)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 철도가 개통되어 부천에 소사역[현 부천역]이 설치되면서 현재의 부천이 형성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소사역은 광활한 김포 평야에서 산출되는 농산물을 모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되었다. 개통 당시 소사 역사는 목조 건물이었으며, 매우 협소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사역이 설치됨에 따라 인근 마을 주민들이 이주해서 여객을 상대로 한 접객 업소와 음식점 등이 생겨났으며, 성주산 서쪽 기슭으로는 가로촌(街路村) 형태의 취락이 발달하였다. 그 후 1908년쯤 이곳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복숭아 과수원이 늘어나 경작을 위한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자 인근 지역 주민들의 이주가 가속화하면서 취락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을 병합한 일제는 1914년 조계를 폐지함과 동시에 부제를 실시하면서 일본 조계 지역과 다소면 일부를 합하여 인천부로 삼고, 나머지 지역과 부평군을 합해 부천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부천’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신설된 부천군은 인천부의 일부와 부평군을 중심으로 강화군의 일부 섬, 남양군의 대부면과 영흥면의 섬들을 포함하여 15면 160리에 달하였다. 당시 부천군청은 인천 도호부가 위치한 문학면 관교리에 있었다. 소사역 일대는 계남면에 해당하였는데, 계남면은 1931년 소사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41년 소사읍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부천군 15개 면 가운데 계남면·오정면·소래면이 현재의 부천시 영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1919년 일제의 식민지 지배 체제에 항거한 3·1 운동이 발발함에 따라 부천 지역에서도 격렬한 항일 시위가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24일 군중의 습격을 받아 계남면사무소의 조자창과 판벽 등이 파괴되었다. 이후에도 부천을 중심으로 항일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현대]
광복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국에 이어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천 지역 민심도 불안한 양상을 보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신앙촌의 건설이다. 신앙촌의 건립 주체는 ‘전도관(傳道館)’이라는 기독교계 신종교 교주 박태선이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장로였던 박태선은 1957년 부천군 소사읍 범박리를 중심으로 신앙촌을 건설하였다. 총 43만 평[약 1.42㎢]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300여 동의 주택과 50여 동의 공장 및 각종 공공 시설을 건설하고 1만 명 이상의 신도들을 입주시켰다. 한때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신앙촌은 점차 쇠락하여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찾을 길 없고, 전도관과 시온 고등학교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1960년대 초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되면서 공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이루어졌으며,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의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였다. 이에 따라 1973년 행정 구역 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수도권의 합리적인 개발과 인구 집중 억제, 무질서한 시가지 팽창 방지를 위해 수도권의 관할 구역 조정이 있었다. 이때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되었다.
1990년대 수도권 일대에 대한 신도시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중동 지구 택지 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부천은 도시화가 급격히 이루어졌다. 중동 지구 택지 개발 사업은 정부의 200만 호 주택 건설 계획의 실현, 토지 자원의 효율적 이용 및 도시 구조 개편, 대규모 택지 개발 및 주택 공급을 통한 사회적 불만 요인의 제거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 사업은 부천시 춘의동·삼정동·심곡 3동·상동·중동·송내동의 6개 동 약 165만 평[약 5.45㎢]에 이르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이 사업으로 인해 부천으로 유입되는 인구는 당초 17만 명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1995년을 전후한 시기에 위 6개 동의 인구는 26만여 명으로 당시 부천시 전체 인구의 30% 이상을 점유하였다.
2016년 7월 4일 부천시는 기존에 시 산하에 있던 원미구, 오정구, 소사구를 폐지하는 행정 체제 개편을 단행하였다. 그동안 시·구·동으로 이어지는 3단계 행정 체계를 시·동의 2단계로 간소화한 것으로 기존 구청이 하던 업무를 ‘행정 복지 센터’에서 처리하는 시스템이다. 이는 1988년 이래 28년 동안 유지해 왔던 구 제도를 폐지하는 정책으로, 일반 구를 두고 있던 시가 자발적으로 구를 폐지한 것은 부천시가 전국 최초이다. 행정 복지 센터란 2~5개의 동 주민 센터를 하나의 권역으로 묶고 그 중심이 되는 동[행정 복지 센터]에 인력과 기능을 확대하여 구청 업무와 복지, 일자리 상담, 건강 관리, 청소 등 주민 생활과 밀접한 현정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다. 36개 동 중에서 권역별로 중심이 되는 원미 1동, 심곡 본동, 심곡 2동, 중동, 중 4동, 상 2동, 소사 본동, 괴안동, 성곡동, 오정동 등 10개 동의 주민 센터가 행정 복지 센터로 확대 개편되었다. 시청과 구청에서 중복되는 업무가 35.5%라는 조사 결과와, 편차가 컸던 3개 구[원미구 52%, 소사구 27%, 오정구 21%]의 행정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이 제도를 통해 구청 인력의 60%를 동 주민 센터에 배치해 현장 행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행정 개혁을 계기로 부천시는 보다 효율적인 행정을 제공하고 시민 친화적인 행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