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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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Hahoe Which is the Most Korean Traditional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정현 |
[개설]
물이 돌아 흐른다고 하여 ‘물동이동’이라고도 하는 하회(河回)는, 이외에도 하회(河廻)·하상강촌(河上江村)·하외(河隈)·하촌(河村)이라고도 불린다. 행정구역상 안동시 서남단에 위치한 풍천면의 한 마을로, 하회1리와 서원·적은못골·아래밀골·웃밀골·새마을이 속한 하회2리로 나누어져 있다.
하회마을에서 외부로 통하는 길은 마을의 동쪽에 있는 작은고개와 큰고개를 넘어 중리를 거쳐 풍산, 안동, 예천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배나들과 충효당 쪽에서 거룻배로 화천을 건너 광덕·앞개로 통하는 길, 과거 소금배가 가던 길을 따라 화천을 거슬러 안동 등지로 가는 물길이 있었다. 이런 지리적 고립이 하회마을만의 독자적인 마을 형상과 절묘한 자연 경관, 그리고 풍수지리상의 길지로 주목받게 하는 동시에 다른 마을과 구별되는 개성 있는 전통문화를 생성하고 전승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길 끝에 자리 잡고 물 위에 떠 있는 하회]
하회마을은 마을의 주산에 해당하는 화산에서 서쪽으로 다리미 모양을 한 곡류천의 퇴적 면이 반도를 이룬 배산임수형이다. 풍수지리상으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또는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는 ‘태극형’의 형국을 이루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배가 떠나는 형국이라 해서 ‘행주형(行舟形)’, 혹은 마을이 입지한 모양을 본 따서 ‘다리미형’이라고도 한다.
하회마을의 산세를 살펴보면 주산인 화산은 마을 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산록에 농경지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하당(일명 삼신당)에서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선 둔덕에 하회마을의 주요한 사회적 경관을 상징하는 지표로서 양진당(養眞堂)과 충효당(忠孝堂) 등이 자리하고 있다. 남산은 화산 건너편 일월산(日月山)의 끝닿는 곳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의 산봉우리들을 총칭하는 단어이다. 풍수상 주산인 화산 맞은편의 안산(案山)이 되며, 원지산은 남산의 우측 후방에 있는 조산(朝山) 격의 산으로서 원지라는 약초가 많이 나는데, 과거에는 송이버섯과 시효가 자생했다.
하회마을의 지맥을 에워싸고 흐르는 화천(일명 꽃내)은 낙동강의 중상류에 해당한다. 우기에 이 화천이 범람하면 마을 입구 인근에 있는 농경지가 침수되어 많은 피해가 났다. 섬들에 농사를 많이 지었던 시절에는 우기의 물의 방향에 따라 들의 면적이 크기를 달리하여 장마철 화천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눈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리미형국이라 그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혹은 행주형이라서 배에 구멍을 내지 않기 위해 마을에 우물 파는 것을 꺼리던 주민들에게 화천은 식수로서도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화천은 또한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종의 물고기가 풍부하게 서식하여 주민들은 사계절 내내 화천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영양소를 섭취했다. 화천은 자동차를 통한 육로 교통이 활발하기 전까지 교통로로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현재는 부용대 앞의 배나들에만 나루터가 있지만 과거에는 충효당 앞에도 나루터가 있어서 각기 광덕과 앞개를 통해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길목 역할을 하여 낙동강의 소금배도 통상 배나들까지 올라왔고, 물길을 봐서 안동 등지로의 상류 행을 결정하곤 했다.
화천의 마을 쪽 기슭에는 100여 년 된 소나무군락이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 북서쪽에는 30~40년생의 포플러 군락이 식생하고 있다. 또한 서쪽과 남쪽에도 수령 500년 이상의 직경 2m 정도의 느티나무 여섯 그루가 있다. 이 느티나무들은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군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들 나무들은 풍수지리상 허한 곳을 가리기 위한 ‘동쑤’로 보이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마을의 서북쪽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과 홍수로부터 강가의 농경지와 주택을 보전하기 위해서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
하회마을을 처음 연 성씨는 김해허씨였다. 마을의 개촌사를 축약한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향언 속에는 마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회마을에 제일 처음 터를 잡은 것은 김해허씨이고, 그 터전 위에 문중을 열었던 것은 광주안씨이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것은 풍산류씨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풍산류씨는 고려시대 토성이족으로, 호장(戶長)을 세습하면서 풍산현 상리동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14세기 중엽 전서공(典書公) 류종혜(柳從惠)가 본관지를 이탈하여 신분을 사족으로 상승시키면서 하외촌(河隈村)으로 이거하였다. 16세기까지 하회에는 류씨·배씨와 그들의 여서(女婿)가 거주하였는데, 동원록(洞員綠)의 내용으로 보아 허씨·안씨가 함께 거주했던 이성(異姓) 잡거촌이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확립되고 장자 중심의 재산 상속이 이루어지면서 제사도 장자가 맡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점차 동성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하회의 경우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라는 이름난 인물을 배출함으로써 정치적·사회적 기반을 구축하여 쉬이 풍산류씨 동성마을로 변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의 취락』에 따르면, 1930년 하회마을 가구 수는 모두 290호였다. 그 가운데 동성인 풍산류씨가 158가구, 기타 성씨가 132가구로, 풍산류씨가 마을 전체 가구의 약 54%를 차지하고 있다. 1961년 간행된 『안동대관』에 따르면 하회마을의 총 가구 수는 249가구, 인구는 1,328명이다. 그 뒤 산업화의 영향으로 인구가 감소하여 2004년을 기준으로 하회마을의 총 가구 수는 104호이다. 이를 성씨별로 살펴보면 풍산류씨 69가구, 김씨 12가구, 이씨 8가구, 기타 성씨 15가구로 풍산류씨가 마을 주민의 약 66%를 차지하고 있다. 2009년 6월 현재 하회마을의 총 가구 수는 110호이고, 총 인구는 226명이며, 총 가옥 수는 124동이다.
하회마을은 1984년 1월 10일 중요민속문화재제122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하회마을이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사유를 살펴보면, “경상북도 하회마을은 전통적인 민속마을로서 민가 건물 및 마을 조경이 잘 보존되어 있고 주변 자연 경관이 수려하여 마을 및 주변 자연 경관을 함께 지정하여 보존하고자 하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한편, 1999년 4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하회마을 방문은 범국민적인 관심을 끌었으며, 수많은 관광객이 하회를 방문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은 유명세에 힘입어 현재도 많은 관광객이 하회마을을 찾고 있으며, 관광 명소로서 각광받고 있다.
그런데 하회마을이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고 관광지로 변모하면서 미세하게나마 하회마을의 인구 증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볼 수 있다. 몇몇 가구의 경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서비스업으로 생업을 잇기 위해 외지에서 마을로 들어왔으며, 일찍이 교육이나 직장 등을 이유로 하회마을을 떠났던 사람들도 돌아와서 식당이나 민박 그리고 기념품 가게 등을 차리고 있다. 일종의 관광 산업이 하회마을의 인구 유출을 상대적으로 막아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회 사람들의 생업]
하회마을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농업을 기반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1910년대 초기 하회마을의 토지 규모는 밭 1,148,801.86㎡(60.6%), 논 745,715.75㎡(39.4%)로 총 1,894,517.61㎡이다. 전체 토지 가운데 외지인이 소유한 것은 밭 188,463.66㎡(16.4%), 논 126,469.99㎡(16.9%)로 총 314,933.65㎡(16.6%)에 이른다. 당시 하회마을 사람들이 경작하던 토지는 1,586,784㎡로 대부분 풍산류씨들이 소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농경지는 화산의 남서 산록 지대인 윗들과 향교골, 탑골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밖에도 큰 고개 좌측의 협곡 지대인 노가리에도 농경지가 있었으며, 1950년대 초반까지도 300여 두락이나 되었던 섬들이 부용대 건너편에 있었다. 이런 농경지들은 1965~1968년과 1974년에 이루어진 「농촌 근대화 촉진법」 등의 정책에 따른 양수장 설치 이전에는 거의 모두가 천수답이었다. 양수기가 설치되면서 윗들과 향교골 일부의 밭과 천수답이 거의 대부분 수리안전답으로 바뀌었다. 1974년에 양수기를 바꾸고 수로를 확장하면서 탑골의 토지도 수리안전답이 되어서 모두 양수 시설의 혜택을 받고 있다.
하회마을의 농경지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곳이 부용대 건너의 ‘뻘’이다. 주민들은 이곳을 ‘뻘’이나 ‘섬’, 혹은 ‘섬들’이라 부르는데, 1954년의 갑오년(甲午年) 대홍수 이전까지만 해도 그 넓이가 300여 두락에 달해서 하회마을의 주요한 생산 터전의 구실을 했다. 섬들은 땅의 힘이 좋아 화학비료가 없던 시절에 “다른 땅에 채소를 심으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채소류와 피, 기장, 아주까리 등 어떤 작물이든 심기만 하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풍산들과 광덕, 인금 등지에 있는 농경지는 과거 풍산류씨들의 명망을 유지하는 기반이자 하회마을 사람들의 생업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그런데 2004년을 기준으로 하회마을 사람들의 주요 생업은 상업과 농업으로 나누어진다. 이중 농업과 상업을 겸하고 있는 가구 수는 약 15호이며, 농업을 전업으로 하고 있는 가구 수는 총 16가구이다. 이들의 토지 규모는 논이 409,000㎡, 밭이 184,000㎡이다.
[양반문화의 정수를 간직한 하회]
하회마을은 양반마을로 유명하다. 인물·학문·예법·유무형의 문화유산 등으로 대변되는 것이 양반마을이라면, 하회마을은 풍산류씨 세거지로서 다양한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지켜오고 있으며, 바로 이러한 문화유산 속에 양반문화의 정수들이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먼저 유형의 문화유산은 서원과 누대정사(樓臺精舍), 고택, 전적과 고문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서원은 겸암 류운룡의 학덕을 기려서 1786년(정조 10)에 유림들이 세운 화천서원(花川書院)과 풍악서당(豊岳書堂)의 전신으로 1613년(광해군 5)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등 사림의 공의로 류성룡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제260호)이 있다.
누대정사에는 사간을 지낸 안팽명(安彭命, 1447~1492)이 독서하던 곳인 천당정(泉堂亭)과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이 독서와 휴식을 하던 서림정(西林亭), 1567년(명종 22) 봄 류운룡이 건립해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던 겸암정사(謙庵精舍, 중요민속문화재 제89호)가 있다. 그리고 1583년(선조 16)에 류운룡이 진보현감을 사퇴하고 돌아와 지은 뒤 서재로 사용했던 빈연정사(賓淵精舍, 중요민속문화재 제86호)와 역시 류운룡의 정자로 현재 손수 심은 소나무 숲만 남아 있는 만송정숲(천연기념물 제473호), 1586년(선조 19) 류성룡이 세운 옥연정사(玉淵精舍, 중요민속문화재 제88호), 1576년(선조 9) 류성룡이 부친상을 당해 조정에서 잠시 물러나 고향에서 지내면서 학문을 닦고 은둔 정양했던 원지정사(遠志精舍)와 연좌루(燕坐樓, 중요민속문화재 제85호) 등이 있다.
고택으로는 풍산류씨의 대종택으로 류운룡의 종택이기도 한 양진당(보물 제306호)과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보물 제414호), 용궁현감을 지낸 류교목이 1661년(현종 2) 창건한 하동 고택(河東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177호), 경상도도사를 지낸 류도성(柳道性)이 1862년(철종 13)에 창건한 북촌택(北村宅, 중요민속문화재 제84호), 1797년(정조 21) 형조좌랑 류기영이 건립한 남촌택(南村宅, 중요민속문화재 제90호) 등이 있다. 이 밖에 조선 중기의 건축물로 류도관의 호를 따서 작천 고택(鵲泉古宅)이라 불렀던 류시주 가옥(柳時柱家屋, 중요민속문화재 제87호)도 하회에서 만날 수 있는 고택이다.
주요 전적으로는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회고하며 전후 사정을 적은 『징비록(懲毖錄)』(국보 제132호)을 비롯해 『영군편성도(營軍編成圖)』(보물 제160호), 『난후잡록(難後雜錄)』(보물 제160호), 『근폭집(芹曝集)』(보물 제160호), 『진사록(辰巳錄)』(보물 제160호), 『군문등록(軍門謄錄)』(보물 제160호) 등이 있다. 주요 고문서로는 「선조대왕 친필 밀부유서」(보물 제160호), 「서애선생 필첩」(보물 제460호), 「영의정 임명 교지」(보물 제160호), 「문충공시호교지」(보물 제160호), 「곤문기(昆文記)」(보물 제160호), 「부의기(賦儀記)」(보물 제460호), 「선조제문(宣祖祭文)」(보물 제160호), 「왕세자광해군제문(王世子光海君祭文)」(보물 제460호), 「정조제문(正祖祭文)」(보물 제460호), 「순조제문(純祖祭文)」(보물 제160호), 「고종제문(高宗祭文) 및 제물단자(祭物單子)」(보물 제460호)가 있다.
하회마을에서 전해 오는 무형의 문화유산으로는 불천위제사와 회전합사(會奠盒祀), 관혼상례 등 의례 문화를 꼽을 수 있다. 양진당과 충효당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양진당 종택에서는 류중영과 그의 아들 류운룡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종택 뒤편으로 류중영의 신주를 모신 사당과 류운룡과 4대 조상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불천위를 같은 장소에 모시지 않는다는 원칙에 근거하여 부친인 류중영을 모신 사당을 별도로 건립한 것이다. 충효당 종택에서는 류성룡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는데, 종택 좌측에 류성룡의 신주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제사에 소요되는 비용은 풍산읍 수리에 있는 위토에서 충당하고 있으며, 제사 하루 전에 유사 2명과 산보(山保) 1명이 제물 장보기를 한다.
풍산류씨의 회전일은 각 파조(派祖) 별로 날짜가 정해져 있다. 소임을 맡은 유사는 위토의 관리와 제례의 준비 및 그 밖의 모든 행사를 주관한다. 그리고 풍산류씨 문중에서는 류운룡이 살아생전부터 합사의식을 창안해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다. 당시 조상의 묘소 위치를 문중의 연소한 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관례를 치른 문중 자제들로 하여금 3년마다 한 번씩 가을 시사 때 조상의 묘소가 모셔진 각 위 별로 나누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약 200~300명의 문중원들이 참여하는 합사는 50여 명씩 6소(所)로 나뉘어 보내진다.
이밖에 무형의 문화유산으로 화전놀이와 선유줄불놀이가 있다. 먼저 화전놀이에 대해 살펴보면, 하회마을 여성들은 날씨가 따뜻해지고 참꽃이 필 무렵에 가까운 곳으로 화전놀이를 갔다. 화전놀이의 장소는 주로 병산서원이나 옥연정사 등 경치가 좋은 곳을 선호했다. 화전놀이를 할 곳에 도착하면 주로 비빔밥을 해먹은 다음 참꽃을 꺾어 화전을 만들어 먹었다. 식사를 마치면 가사를 지어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윷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매년 7월 기망(旣望)에 정례적으로 행해졌던 선유줄불놀이는 품격과 운치가 곁들여진 양반놀이문화의 정수로 알려졌다. 이 놀이는 불꽃놀이와 뱃놀이, 그리고 달걀불과 선상의 시회(詩會)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선유가 주이고 줄불과 달걀불, 낙화는 선유의 흥취를 돋우기 위한 부대 행사였다. 이 놀이는 1933년경까지 전승되다가 중단되었으나 현재 복원되어 행해지고 있다. 이처럼 여러 가지 놀이가 다채롭게 어우러진 선유줄불놀이는 당시 안동 양반들의 놀이 세계를 음미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민속문화가 생동하는 하회]
하회마을에는 양반문화 못지않은 유무형의 다양한 민속문화가 전승되고 있다. 먼저 대표적인 유형의 민속문화로는 하회탈을 꼽을 수 있다. 하회탈은 1964년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 양반, 선비, 중, 초랭이, 각시, 할미, 부네, 이매, 백정, 총각, 별채, 떡다리 등 12개의 탈이 있었으나 현재는 별채, 총각, 떡다리탈을 제외한 9개의 탈만 전한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하회탈의 제작 시기는 고려 후기인 1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하회마을에는 허씨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마을에 재앙이 들었는데 허도령이라는 사람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탈을 12개 만들어서 그것을 쓰고 굿을 하면 재앙이 물러갈 것”이라는 계시를 주었다. 그리고 “탈이 다 만들어질 때까지 누구도 들여다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까지 일러 주었다고 한다.
현몽을 한 허도령은 그때부터 목욕재계하고 문밖에 금줄을 친 다음 방문을 걸어 잠근 채 긴 시간 탈 제작에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도령을 사모하던 처녀가 금줄을 넘어 허도령이 머물렀던 방문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았다. “누구도 들여다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신의 금기가 깨지는 순간 허도령은 마지막으로 만들던 이매탈의 턱을 완성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면서 죽었고, 이로 인해 이매탈은 지금까지 턱이 없는 채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한다. 하회탈은 평소에 동사의 다락에 보관하지만, 별신굿을 할 때는 섬에 넣어서 ‘청광대’가 관리했다. 주민들은 평소 탈을 볼 수 없었는데, 부득이하게 보아야 할 경우에는 신에게 먼저 고해야 했다고 전한다.
다음으로 동제와 하회 별신굿 탈놀이를 들 수 있다. 하회마을에는 다른 마을에 비해 제당이 다섯 군데나 될 정도로 많다. 중요한 당으로는 화산 중턱에 있는 무진생 김씨를 모신 서낭당(일명 상당)과 화산자락의 묘지와 논들 사이의 숲속에 외따로 자리 잡고 있는 국사당(일명 국시당·국신당·중당), 그리고 마을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삼신당(일명 하당) 등이 있다.
동제는 정월 대보름과 사월 초파일에 올린다. 하회마을에서는 다른 마을과 달리 종신토록 동제와 별신굿의 제관 노릇을 하는 산주를 정해 두고 매월 삭망 때마다 서낭당에 올라가서 기도를 드리는가 하면, 서낭신의 계시에 따라 별신굿을 주관하고 있다. 한편 성황제는 동제인 평상제와 5년 또는 10년마다 부정기적으로 행하는 별신굿이 있다.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1928년인 무진년(戊辰年)에 마지막으로 연행되었는데, 그 해가 성황신의 갑년(甲年)이었다. 즉 별신굿은 성황신에 대한 대제(大祭)이며, 탈놀이는 별신굿의 한 부분인 오신(娛神) 행위에 해당했던 것이다. “하회 별신굿을 보지 못하면 죽어서 좋은 데 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회마을 별신굿은 근동에서 유명했다. 그래서 1928년 무진년에도 인근 마을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서 별신굿을 구경했다고 전한다.
섣달 보름날 별신굿의 책임자인 산주는 서낭당에 올라가서 별신굿을 할 것인지를 신에게 여쭌다. 신탁이 내리면 마을 어른들에게 알리고, 부정하지 않은 목수에게 ‘내림대’와 ‘서낭대’를 만들게 한다. 스무 아흐렛날 부정이 없는 주민들 가운데 광대의 배역을 결정하는데, 한 번 결정되면 거절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의상 및 기타 준비물을 갖추어 섣달 그믐날 동사(洞舍)에 모여 보름 동안 합숙을 한다.
광대는 산주, 큰광대, 각시광대, 양반광대, 선비광대, 중광대, 할미광대, 부네광대, 초랭이광대, 이매광대, 백정광대, 주지광대(2명), 대를 메는 광대(2명 또는 그 이상), 청광대, 유사(2명), 무동꾼(2명) 등 20여 명으로 구성된다. 탈놀이는 서낭당에서 강신을 한 다음부터 이루어지며, 이후 무동마당 → 주지마당 → 백정마당 → 할미마당 → 파계승마당 → 양반·선비마당 순으로 진행된다.
[한국문화의 대표 아이콘 하회]
하회마을은 전국에서 소문난 양반마을이다. 풍산류씨 동성마을로서 그 가문의 위세가 대단하다. 류운룡과 류성룡 형제처럼 대단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중앙 정계에서 높은 벼슬자리에 오른 인물도 상당히 많다. 류운룡과 류성룡 형제의 두 종가는 물론 남촌택과 북촌택의 위용도 그 솟을대문처럼 우뚝하다. 선비를 양성하던 병산서원과 화천서당, 선비들이 시문과 풍류를 즐기던 겸암정사와 옥연정사 등의 유교적 경관물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이렇듯 유교적 전통이 강한 하회마을에서 양반과 선비를 풍자하는 별신굿 탈놀이가 고려시대부터 전승되고 있다. 이것은 풍산류씨들이 지금의 하회마을에 이주하여 자리를 잡아 가문을 이루면서도 별신굿과 같은 기존의 민속문화를 없애지 않고 오히려 뒤에서 후원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불교문화와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류성룡의 종가인 충효당 앞뜰에도 석탑과 같은 불교 유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삼신당 근처에도 같은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는 하회마을에 불교문화가 꽃피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풍산류씨들이 지금의 하회에 입향하여 자리를 잡기 전 하회의 주산인 화산 기슭의 탑골에는 장안사라는 절이 있었고, 지금도 연화사라는 절이 있다. 탑골은 곧 절골이나 다름없다. 유교를 정치적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조의 사사혁파(寺社革罷) 정책에 의하여 사찰은 보호받지 못했지만 풍산류씨들은 장안사와 이웃하여 마을을 개척하였고, 또 지금까지 연화사라는 절과 함께 하고 있다.
처음으로 하회에 터를 잡은 전서공 류종혜가 지금의 양진당 자리에 집을 지을 때도 한 고승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집을 짓고자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려놓은 다음 자고 일어나면 집이 허물어지기를 거듭하여 곤란을 겪었는데, 한 고승이 찾아와서 하회마을로 들어오는 큰고개에서 3년 동안 만인적선을 하면 집을 지을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류종혜는 이 말에 따라 마을로 들어오는 큰고개에 관가정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길 가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적선을 오랫동안 한 뒤에 비로소 집을 지어 하회에 터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전설로 미루어 풍산류씨들이 마을에 자리를 잡는 데 불교 세력의 도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저술하던 옥연정사도 한 승려가 시주를 하여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관계는 풍산류씨들이 유가(儒家)의 문벌이면서도 불교를 의도적으로 배척하지 않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하회마을은 유교문화가 지배적인 반촌이었지만, 별신굿과 같은 무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민속문화의 전통을 고려 후기 이래 조선조 500년을 넘어서 지금까지 이어왔다. 그리고 억불숭유 정책이 엄격했던 조선조 유교 사회에서도 불교문화와 친화적 관계 속에서 자기 문화를 가꾸어 왔다. 이것은 당시의 주류 문화와 상관없이 기존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켜왔을 뿐 아니라, 기존 문화의 전통 위에 새로운 문화를 우호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하회마을에는 이웃의 어느 마을보다 기독교가 빨리 들어왔는데, 반촌으로서 유교문화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교회와 같은 새로운 문화 역시 배척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회마을은 한국의 전통적인 다양한 문화를 흡수해서 자기 것으로 체화해 내는 능력을 발휘해 오면서도 독창적인 정체성을 지켜온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천여 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마을인 것이다. 게다가 하회마을의 전통문화는 박제된 문화가 아니라 여전히 현실에서 꿈틀거리며 실존하는 문화여서 온 마을이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1984년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데는 이렇듯 풍산류씨들의 세거지로서 빼어난 자연 환경뿐만 아니라 유무형의 상하층 문화를 고루 갖추고 있는 한국의 대표 마을이자 살아 생동하는 민속문화의 보고라는 점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