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0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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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化藝術 |
영어음역 | Munhwa Yesul |
영어의미역 | Culture and Art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재성 |
[정의]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의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
[개설]
엄격한 유교 사회인 조선과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치하를 거치는 과정에서 문화(文化)라는 개념 자체가 정립되지 못해 왔다. 광복 후에 들어와서야 사회 운동 차원의 일부 국민 재건 운동이 있기는 했으나 거의 관(官) 주도의 행사에 그쳐 진정한 의미의 문화 활동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김천시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도 1952년 문화 예술에 관심을 가진 몇몇 인사들을 중심으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문화 활동을 통한 시민의 위안과 김천시의 면모를 새롭게 해 보자는 취지로 뜻을 모으기 시작했다. 김천시 문화 운동은 6·25 전쟁으로 최전방에서는 포성이 요란했던 휴전 협정 이전에 태동했다.
[변천]
김천시는 다른 도시에 비해 역사가 짧고 전통이 얕은데다 6·25 전쟁이 남기고 간 상흔은 너무 깊었다. 시민들은 실의에 빠지고 허탈감에 빠져 정서 생활은 엄두도 낼 수 없었으며 문화, 오락 시설이라곤 물론 없었다. 이런 상황 아래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삭막한 고장에 전재민을 위로하고 문화의 씨를 뿌려 꽃을 피워 보고자 마음을 모았다. 1952년부터 이런 모임이 잦았는데 주로 모인 사람은 강중구(姜重求)를 중심으로 문화 예술 언론에 관심이 있는 박재호, 김수명, 유만식, 문종두, 김기수, 류승모 등이었다. 남산동 과하주천 근방의 ‘자야네집’을 자주 찾아 ‘문화인 하우스’라 이름 지어 문화 운동을 토론했다.
1953년 11월 10일에는 인선의원에서 강중구, 김상민, 문종두, 박재호, 이재영 등이 좌담회를 열고 문화 서클 창설을 협의했다. 이후 11월 22일 인선의원의 2차 좌담회에서는 ‘문화 교실’의 이름으로 실시해 오던 문화 행사를 ‘문화의 집’으로 열어 개최하기로 하고, 1954년 2월 24일 문화의 집 운영위원회를 조직했다.
1955년 6월에는 문화의 집 운영위원으로 설기환, 홍성문, 손홍수 등이 보강되었다. 전년부터 문총지부 결성에 대한 논의가 있어 운영위원회의에서 설기환을 연락 준비자로 선출까지 했으나 실행을 보지 못했다. 운영위원회 제9차 회의에서는 문화의 집에서 동인지 『소문화(小文化)』를 발간키로 결정하고, 1955년 6월 10일 프린트 인쇄 92면의 『소문화』 창간호가 나온 이후 현재의 『김천문화』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1959년에 와서는 문화의 집의 기구를 위원회 아래에 상임위원회를 두고 상임위원회 안에 문학, 미술, 음악, 웅변, 무용, 사진, 교육, 시조, 가요 등 9개부를 두어 문화의 집 행사를 구체화하고 문화 행사를 실천해 나갔다.
1955년 5월 5일에는 ‘문화의 집’ 상설관으로 지금의 김천중앙초등학교 정문의 좌측 건물 2층에 ‘김천문화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개관하니 이것이 김천문화원의 전신이다. 문화의 집은 순수 문화인의 친목 모임인데 반해, 문화관은 상설 기관이다. 문화관은 조직을 점차 확대하여 사회 인사들을 영입하고 회칙도 정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김천문화관은 날이 갈수록 각종 행사가 활발해지고 활동 범위도 넓어져 기구도 확대되었다. 운영위원장은 강중구가 맡고 관장은 김천시 교육감 최길진이 맡았다. 문화관은 상임위원회와 운영위원회의 2원제 조직으로서, 운영위원회가 결의 기관이었다면 상임위원회는 집행 기관 역할을 했다.
전국의 문화 단체는 각각 나름대로의 명칭으로 불러져 왔는데 1962년 전국 문화 단체 연합회가 결성되고 그 명칭을 문화원으로 통일키로 결정함에 따라 김천문화관도 1962년 2월 25일 총회를 열어 김천문화원으로 개칭하게 되고 새로운 회칙도 총회를 거쳐 개정되었다.
김천문화원은 전국문화원연합회가 구성되고 문화원 간에 횡적인 유대를 가지고 문화 활동에 관한 정보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24년간에 걸쳐 문화원을 이끌어온 강중구의 타계까지 전국에서도 최우수 문화원의 하나로 지목되고 김천 지역 문화 활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문화원연합회의 1시군 1원 설치 방침에 호응하여 금릉문화원을 아포공회당에 설치하였으나 별다른 활동을 펴지 못하다가 1974년 지례면 원사를 신축하고서부터 그런대로 활발한 사업을 펴게 되었다.
1993년도 실시한 중요 행사를 들면 향토 문화 유적지 순례, 경북 농악 경연 대회 참가, 경로 효친 사상 선양 대회, 충효 교실 운영, 한시 백일장, 사생 대회, 서예 대회, 민속놀이 행사와 발간 사업으로는 『금릉문화』와 『금릉군지』, 『마을유래지』, 『향토사료집』, 『금석문집』의 편찬을 들 수 있다. 또한 삼도봉 3시군 화합의 행사로 화합탑을 건립했다.
광복 후 사설 흥행장은 있었으나 공공시설의 공연장은 없었다. 1965년 김천문화원에서 비교적 큰 규모의 다목적 공연장인 김천문화센터를 전국에서 처음으로 건립했다. 문화센터가 건립된 이후 30여 년 간 김천의 문화 예술 행사는 거의가 이곳에서 이루어져 지역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초대 통합 김천시 민선 시장으로 당선된 박팔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고 있는 시민의 문화 예술 욕구를 충족시키고 전국 규모의 문화 예술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현대식 문화 예술 회관 건립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고 3년여에 걸쳐 건립하게 되었다.
김천시 삼락동에 2000년 4월 15일 김천시 문화예술회관(Gimcheon City Culture & Art Center)이 국공립 공연장으로 개관되었다. 김천시 문화예술회관의 설립 목적은 지방 문화 예술의 진흥에 기여하고 시민 예술의 향상 및 전통 문화의 전승을 도모하는데 있다. 운영 목표는 시민들에게 수준 높은 공연 전시를 기획하여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지속적인 시설 보강으로 국내 최고 수준의 회관으로 자리매김하여 감동과 아름다움이 있는 생활 속의 문화 공간으로 운영하는데 있다.
주요 연혁을 살펴보면, 1996년 3월 29일 김천시 문화예술회관 건립 기획단이 구성되었고, 1996년 4월 9일 부지를 확보하였으며, 1997년 1월 31일 우현건축사무소에서 설계를 맡았다. 1997년 8월 14일 월드건설이 공사를 착공하고, 1999년 11월 3일 개관 준비단이 구성되었다. 2000년 3월 29일 준공되었으며, 2000년 3월 30일 김천시 문화예술회관 운영 조례가 제정되었다. 2000년 4월 15일 개관하여 2000년 8월 31일 직제가 승인[김천시훈령 제67호]되었다.
운영 목표는 지역 문화 예술의 기반을 조성하고, 국내 최고 수준의 회관 시설을 관리 운영하며, 지역 문화 예술인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데 있다. 또한 시립 예술단 창단과 수준 높은 공연으로 문화 수준 향상을 기하고, 지역 문화 예술의 특성화 및 차별화를 시킬 수 있는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며, 문화 예술 활동의 기반을 조성 확립하는데 있다. 그 외에도 문화 정보화를 통한 지역 사회 기반을 촉진하고, 경영마인드를 도입하여 생산적이고 공익을 추구하는 기획 공연 및 전시 행사를 추진하는데 있다. 현재 운영 현황을 살펴보면 문화예술교육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소속 단체 운영으로는 김천시립예술단[국악단, 소년소녀관현악단, 합창단] 등이 있다. 또한 각종 기획 공연 전시 및 각종 대관 공연 전시 행사를 운영하고, 광역 문화 정보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그 외에도 지역 주민의 욕구에 충족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시민들이 항상 이용하도록 상설 전시장 및 학생들의 현장 체험 학습장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김천시 문화예술회관의 대공연장은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를 축소 설계한 것으로 뒤쪽 무대와 좌우 옆 무대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여 대형 공연을 원작 그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최신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있다. 무대와 객석이 가깝게 설계되어 있어 공연의 생동감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다. 또한 편안한 좌석과 객석 밑에 설치된 난방관으로 쾌적한 관람이 가능하며 노약자를 위한 엘리베이터와 휴게 시설을 갖추고 있다. 대공연장은 김천시 문화예술회관의 얼굴이며 공연을 위한 각종 시설이 있는 곳이다. 총 827㎡의 무대는 15m×7.5m의 프로시니엄 아치에 이동식 회전 무대[지름 11m], 수평 이동 무대, 경사 무대, 오케스트라 피트, 음향 반사판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주 무대의 승하강 장치에 속도 변환 시스템을 적용하여 오페라, 뮤지컬을 비롯한 각종 음악회를 소화할 수 있도록 설계된 종합 문화 예술 공간이다.
또한 200석 규모의 소공연장은 음악, 무용, 연극 등 각 장르별 특징을 가장 효과적으로 연출할 수 있는 조명과 음향 시설을 갖추고 있다. 각종 문화 행사와 지역민의 문화 예술 발표의 장으로 적합하다.
[음악]
김천에서 현대적인 음악 단체가 생긴 것은 1975년 5월 26일 작곡가 이안삼이 주동해서 만든 김천음악협회가 처음이다. 이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김천지부 창설을 전제한 산하 단체의 하나로 1989년 2월 18일 한국음악협회 김천지부가 창설되고 중앙 인준은 1989년 6월 12일에 받아 음악 전문 단체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음악협회 김천지부는 2007년 청소년 음악회와 학생 음악 경연 대회, 2008년 제16회 김천 예술제 음악 경연 대회, 2009년 제4회 예술 문화 장터 김천 음악제, 2010년 제18회 학생 음악 경연 대회와 예술 장터 한여름 밤의 선율을 개최하였다. 2010년 12월 31일 현재 회장은 이정승, 사무국장은 권오선이 맡고 있다.
김천의 순수 음악 단체로는 김천어린이합창단, 아버지노래회·어머니노래회, 향음회, 김천새마을어머니합창단, 김천여성합창단, 김천시 여성합창단, 김천시립합창단, 김천YWCA소년소녀합창단, 김천YWCA여성합창단, 김천시 합창단, 김천음악협회, 한국음악협회 김천지부 등이 설립되었다. 김천의 국악 단체로는 한국국악협회 김천지부, 대한시우회 김천지회, 김천예술고등학교 국악부, 정산국악원(靜山國樂院) 등이 있다. 김천 지역의 농악 단체로는 빗내농악대, 김천농공고등학교 풍물반, 김천모암초등학교 농악대, 풍악 광대놀이단, 김천문화원 여성풍물단, 개령초등학교 풍물단, 직지초등학교 풍물단 등이 있다.
김천 출신으로 가요 콩쿠르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는 정건수(鄭建洙)와 조기남(曺奇男)이 있었다. 김천 출신으로 중앙 무대에서 작사, 작곡 부분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는 고려성·나화랑(羅花郞) 형제와 문호월(文湖月)이 있었다. 일제 시대 ‘금릉인’, ‘고려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조경환은 「타향살이」, 「나그네 설움」, 「사막의 한」, 「아시나요」를 비롯하여 수많은 가요곡을 작사하여 크게 유행하였다. 조광환(曺曠煥)은 조경환의 아우로 처음에는 순수 음악을 작곡하다가 6·25 전쟁 이후 가요 작곡계로 투신하여 나화랑이란 예명으로 「삼각산 손님」, 「찾아온 산장」 등 수많은 가요곡을 작곡하고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1986년에 세상을 떠났다. 문호월은 어린 시절을 김천에서 보낸 민요조 가요 작곡가로, 본명은 문윤옥이다. 김천에서 자라 오케이레코드에 들어가 작곡과 지휘를 맡으면서 1933년에 「봄맞이」, 1934년에 「노들강변」 등을 작곡하였다.
[미술]
1988년 가을에 김천미술인협회와 김천서화협회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산하 단체인 미술 협회 조직을 전제로 한국미술협회 김천지부를 조직하려 했으나 서예 쪽에 회원 자격자가 모자라 무산되었다. 1990년에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김천지부가 발족된 후 한국미술협회 김천지부가 조직되어 1991년 10월 25일 중앙의 인준을 받았다. 한국미술협회 김천지부에서는 창설 이래 해마다 회원전과 김천 예술제 미술 실기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2010년 12월 한국미술협회 김천지부 회원인 도재모가 제29회 대한민국 미술 대전 전통 공예 부문에서 특선을 수상하였다. 2011년 1월 31일 현재 한국미술협회 김천지부 회장은 김영식이, 사무국장은 강덕규가 맡고 있다.
김천의 미술 단체로는 1953년 창립한 김천화우회(金泉畵友會)를 시작으로 김천미술협회[1974], 청색[1986], 김천미술인협의회[1987], 김천서화협회[1987], 김천수채화협회[1989], 오엔엑스(O&X), 한국미술협회 김천지부[1991] 등이 있다.
김천 지역 최초의 근대 미술인은 송병돈(宋秉敦)으로 일본 동경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933년 김천고등보통학교 미술 교사로 부임하여 교내 개인전을 열엇다. 1941년에는 동양화 중견 작가 최목랑(崔木郞)이 김천중학교 미술 교사로 부임했다가 광복 후 김천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하여 교내 개인전을 열었고 김천문화원의 전신인 김천문화의 집을 근거로 활발한 미술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국적으로 김천 출신의 미술인으로 알려진 이는 김천시 조마면 출신 화가 배렴(裵濂)[1911~1968]이다. 김천의 미술 활동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것은 김천문화원의 전신인 김천문화의 집에 1953년 미술반이 개설되고 김수명(金壽命)이 작품전을 연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배상현(裵相賢)은 1961년부터 1963년까지 김천화우회 회장, 1974년부터 1978년까지는 김천미술협회 회장으로서 김천의 미술 단체를 이끌어 왔다. 김천 출생인 배상현은 김천 화단의 원로로서 송준상과 함께 미술 협의회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도지호(都止鎬)는 김천 출신의 미술 학생을 주축으로 한 제로(ZERO)회전을 매년 열어 20여 회를 이끌어 왔다.
[연극]
2002년 10월부터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김천지부 주관으로 전국 가족 연극제가 개최됨으로써 김천 지역 연극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고, 2008년부터는 한국연극협회 김천지부가 전국 가족 연극제를 이관 받아 김천 전국 가족 연극제를 주관하고 있다. 2010년에는 아동극을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 2010년 12월 31일 현재 한국연극협회 김천지부는 조명래가 지부장을 맡고 있으며, 극단 삼산이수는 노하룡이 대표를, 정지숙이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영화]
김천에 일제 시대 초기 김천시 모암동 43-66번지 전 김천시 보건소 자리에 ‘조선관’이라는 극장이 들어섰다. 1930년대에는 김천시 모암동 161번지 지금의 태양상사 근처에 일본인 후쿠시마가 주식회사 김천좌를 설립하고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조선관’을 인수하여 그 자리에 2층으로 극장을 신축하였다. 1933년에는 김천시 성내동 161-8번지 지금의 골든맨션 자리에 김천극장이 설립되었다. 1961년 김천시 평화동에 김천아카데미극장이 설립되면서 지방으로서는 규모가 큰 흥행장이 두 곳으로 늘어나 김천 지역의 영화관이 호황을 누렸다. 김천아카데미극장은 입석 141석을 포함하여 총 743석 규모로 김천시 평화동 264-27번지 4층에 문을 열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어 극장 이용 관객이 격감함에 따라 제일 먼저 김천극장이 문을 닫게 되었다. 1983년 가고파극장, 1987년 티파니극장, 1989년 12월 한일극장 등 소형 영화관이 차례로 문을 열었으나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 경영난으로 대부분 문을 닫았다. 가고파극장은 1993년 12월에 폐업하였다. 티파니극장은 김천시 평화동에 영화 전용 극장으로 문을 열었다가 1991년에 폐업하였다. 김천시 성내동에 문을 열었던 한일극장도 이후 폐업하였다. 김천아카데미극장은 2000년 3월 경영난으로 폐업하였다. 이후 2003년 7월 30일 김천시 평화동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영화관인 프리머스 김천이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