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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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墳 |
영어의미역 | Ancient Tomb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선사/선사,고대/고대 |
집필자 | 이남석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에 분포하고 있는 선사시대부터 고대에 이르는 무덤.
[개설]
고분은 과거 우리 조상이 묻힌 무덤을 통칭하는 옛무덤을 말하지만, 고고학에서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한정된 시대의 무덤을 말한다. 여기에서 한정된 시대란 고대까지를 말한다. 물론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무덤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이 시기의 무덤 역시 옛무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복원할 문헌 자료가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무덤은 고고학적인 연구 대상에서 제외된다.
고분이란 인간의 마지막 통과의례인 장례의 결과로 남겨진 기념물이다. 고분에는 당시인의 사유체계와 내세관이 담겨져 있다. 무덤의 부장품을 통해 당시 물질 문화의 수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분의 매장 방법을 통해 고대인의 사상 및 신앙, 그 밖에 이와 관계된 풍습과 제도 등을 알 수 있다. 꾸미개·무기·용기(用器) 등으로 그 시대의 문화·미술·공예 수준과 내용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분은 기록에 나타나는 고대인의 생활과 풍속을 실제로 보여주거나 보충 설명해줄 뿐 아니라, 기록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시기의 문화와 생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공주 지역의 고분은 비교적 많은 수가 확인되었으며, 시기적으로는 백제시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는 공주 지역이 한때 백제의 도읍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공주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분은 모두 백제시대의 것만은 아니다.
백제 이전의 유적으로는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분강·저석리 석관묘, 송학리 옹관묘군, 남산리 고분군이 있다. 원삼국시대 혹은 초기 백제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하봉리 토광묘·장원리 토광묘·이인리 토광묘 등이 있다. 또한 백제시대 이후에 조성된 고분도 적지 않다. 이는 공주가 지방 행정의 거점으로서의 위치를 오랫동안 유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는 공주가 백제 웅진시대의 도읍지로서 많은 고분 자료를 남기고 있는 만큼 공주 지역에서 발견되어 조사된 백제시대의 고분을 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백제고분 유적과 특징]
공주 지역에는 공주가 백제의 한 지방으로 있던 당시의 고분 문화와 도읍지가 된 이후의 고분 문화가 함께 공존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은 대체로 백제의 도읍지가 된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이전 시기의 것으로는 봉안리 유적이나 하봉리 유적 정도가 있다. 물론 토광묘나 수혈식 석곽묘처럼 백제의 토착적 묘제가 공주 지역에서 발견될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지금까지는 뚜렷한 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에 비해 백제의 도읍지가 된 이후에 형성된 고분군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무령왕릉이 위치한 송산리 고분군을 비롯해 웅진동 고분군·교촌리 고분군·보통골 고분군·금학동 고분군·신기동 고분군·남산리 고분군·송학리 고분군 등이 있다.
한강 하류 지역에서 성장한 백제는 공주로 천도하면서 횡혈식 석실분을 주된 묘제로 사용하였다. 원래 백제에는 적석총을 비롯하여 횡혈식 석실분·전축분·수혈식 석곽묘·횡구식 석실분·토광묘·옹관묘·화장묘 등 다양한 묘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양한 묘제는 백제를 구성한 주민들이 다양한 문화 계통을 지니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웅진시기에 백제 묘제는 대체로 횡혈식 석실분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남아 있는 고분의 현황도 이를 대변하듯 대부분이 횡혈식 석실분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공주 지역에 남아 있는 횡혈식 석실분 중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궁륭상 천장 구조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웅진시대 중반에 이르러 중국으로부터 새로이 터널형 천장 구조의 석실분이 전해졌다. 이는 이후 백제 횡혈식 석실분의 천장 구조가 점차 터널형 내지는 이의 변형인 단면 6각형으로 통합되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터널형의 천장 구조는 무령왕릉에서 볼 수 있으며, 이후 축조 재료가 벽돌에서 석재로 변했을 뿐 그대로 지속되어 단면 6각형과 단면 4각형의 석실분 단계를 거치면서 백제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사비시대 백제 왕릉지구로 전해지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이 있다. 능산리 고분의 석실분들은 모두 터널형·단면 6각형·단면 4각형의 형태로 남아 있다. 그 만큼 공주 지역의 백제고분은 백제 후기의 고분 문화를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또한 공주 지역에 남아 있는 백제고분 중 석실분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실은 묘제적인 측면에서 공주 지역의 백제고분이 갖는 특징이다. 한성시대까지만 해도 백제고분은 중앙의 지배 세력이 사용하던 묘제와 각 지방에서 사용하던 묘제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으나 점차 통합되어 가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것은 웅진시대에 접어들면서 백제의 중앙과 지방이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주목되는 것은 공주 지역에 남아 있는 백제고분은 웅진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으로, 공주시를 중심으로 인접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점이다. 즉, 금강 남안에 자리한 시가지를 중심으로 서쪽의 송산리, 웅진동, 남쪽의 주미동, 금학동, 동쪽의 옥룡동, 신기동 등이 대표적인 고분군 지역이다. 이는 이 일대의 고분이 백제의 웅진 천도 이후에 조영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웅진 천도 이전 왕성이 위치한 공주시가지의 사회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로 주목된다.
최근에는 공주시가지에서 금강을 건너 북쪽으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의당면 수촌리에서 금동관모와 풍부한 유물이 출토되는 고분군이 조사되었다. 이곳은 웅진 천도 이전에 조성된 유적일 뿐만 아니라 금강을 경계로 일정 정도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다.
[백제고분 문화의 특징]
공주 지역을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에서 확인된 고분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는 공주 지역이 한때 백제의 도읍지였던 것과 더불어 이후 충청감영이 들어서기까지 지속적으로 인류의 생활 터전으로 각광받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공주 지역 고분 문화의 특징은 백제 왕릉이 위치하는 송산리 고분군을 제외하고, 공주시내 백제고분의 분포상에서 찾을 수 있다. 백제고분은 왕성인 공주 공산성을 중심으로 교동·웅진동·봉정동·박산소·우금치·남산·능치·금학동·신기동·월성동·보통골 등에 분포한다.
백제고분은 도성인 공주시가지를 중심으로 그 외곽에 의도적으로 분포하여 공주시가지를 둘러싸듯이 분포하고 있는 양상을 보인다. 공주시에 인접해 있는 고분군은 백제 중앙 세력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앞으로 개별 고분군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관리가 이루어져야 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