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50 |
---|---|
한자 | 忠臣 |
영어음역 | Im Uchun |
이칭/별칭 | 공신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근대/개항기 |
집필자 | 송영호 |
[정의]
전통 시대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신하.
[개설]
김천 지역의 충신을 기록한 자료로는 『품천지(品川誌)』, 『금릉승람(金陵勝覽)』,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교남지(嶠南誌)』, 『금릉군지(金陵郡誌)』 등이 있다. 김천 지역의 충신을 유형별로 나누면 조선 개국에 항거하거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해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음]을 표방하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경우와 무신란,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강점기 등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떨쳐 일어나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목숨을 바친 경우가 많았다.
[내용]
김천 지역에 보이는 자료상의 가장 오래된 충신으로는 고려 말 조선의 역성혁명에 항거하며 불사이군의 충신으로 김산삼충(金山三忠)으로 일컬어지는 김효신(金孝信), 백귀선(白貴璇), 정윤홍(鄭允弘) 등을 들 수 있다. 김효신은 해풍 김씨로 공민왕 때에 경기도 개풍군 대성면 대룡리에서 태어나 일찍이 벼슬길에 나가 사직부위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승정원 승지 백귀선, 송나라의 금자광록 문화시랑 평장사와 상서부형원이 되었고, 부성부원군에 봉해진 정윤홍과 더불어 은거지를 김천으로 정하고 은둔하며 절의를 지켰다.
조선 전기의 충신으로는 박포(朴苞)의 난을 평정해 좌명공신의 훈호를 받고 태종 때 병조판서와 이조판서, 좌찬성을 역임하며 나라에 공을 세운 평절공(平節公) 한옹(韓雍)이 있다. 또 최선문(崔善門)은 단종 때 공조판서를 역임하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버리고 김천으로 낙향했으며, 세조 때 병조판서를 역임한 이호성(李好誠)은 여진족 정벌에 공을 세워 좌익원종 공신에 올랐고, 성종 때 이조참판을 역임한 이약동(李約東)은 만고의 청백리로 기록된 인물이다. 또한 성종 때의 문신 조위(曺偉)는 우리나라 유배 가사의 효시인 「만분가(萬憤歌)」와 당나라 두보의 시를 최초로 언해하여 문예 부흥에 공을 세웠다.
김천의 충신은 국가 위난 시에 크게 빛을 발했는데 임진왜란의 공신 박이룡(朴以龍)과 여대로(呂大老), 배흥립(裵興立)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박이룡은 김천, 영동 일대에서 의병을 조직해 왜적을 방어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여대로는 지례와 거창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또 배흥립은 권율, 이순신 장군의 조방장으로서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워 선무공신에 올랐다. 병자호란 때의 의병장 이언의(李彦儀)는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仁祖)를 구하기 위해 경상도 의병이 주축이 된 쌍령 전투에서 전사해 충장위호군(忠壯衛護軍)을 하사받았다.
이외에도 김천이 배출한 충신으로는 조마 강곡 출신의 강기선(姜基善)과 강석구(姜碩龜), 강설(姜渫), 조마 장암 출신의 권동주(權東柱),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조마 신안으로 낙향한 권세호(權世豪), 조마면 장암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한 권응기(權應期), 권응성(權應聖), 권응시(權應時), 독립운동가인 남산동 출신 권태석(權泰錫), 병자호란 때 창의하여 전사한 대덕면 연화리 출신의 김대홍(金大泓), 부항면 출신으로 무신란 때 공을 세운 김성대(金聲大), 김성옥(金聲玉), 김성진(金聲振), 증산면 금곡리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한 김수길(金壽吉), 대덕면 대리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한 김승려(金承礪), 대항면 대룡리 출신의 김시창(金始昌), 구성면 구미리 출신의 김여권(金汝權), 무신란 때 개령관아를 수호하는데 공을 세운 농소면 봉곡 출신의 김영걸(金永傑), 조선 개국 공신으로 부항면 유촌으로 은거한 김용초(金用超),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김응상(金應祥)과 장홍한(張鴻翰), 김천 하로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한 김응현(金應鉉), 지례 출신으로 무신란 때 전사한 김인상(金仁尙), 무신란 때 공을 세운 김진옥(金振玉), 병자호란 때 전사한 김홍대(金洪大), 고려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조마면 장암으로 은거한 나만(羅蔓), 병자호란 때 창의한 맹세형(孟世衡), 무신란 때 적을 막아 공을 세운 박경의(朴慶儀), 임진왜란 때 전사한 박몽열(朴夢說), 지례면 출신으로 무신란 때 공을 세운 박지영(朴枝榮), 병자호란때 청과의 화친에 항거하며 조마면으로 낙향한 박홍발(朴鴻發), 병자호란때 공을 세운 조마면 신안리 출신의 배명순(裵命純)과 배시량(裵時亮), 대덕면 출신으로 무신란에 공을 세운 서대창(徐大昌)과 정세갑(鄭世甲), 서필중(徐必重), 부곡동 원동에 은거하며 독립운동을 지휘한 송준필(宋浚弼), 구성면 금평 출신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한 여중룡(呂中龍)과 여채룡(呂彩龍), 개령 출신의 독립 운동가 우용택(禹龍澤), 양천동 하로 출신으로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거인(李居仁), 구성면 상좌원 출신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 옥사한 이명균(李明均), 조마 대방 출신의 항일 운동가 이병구(李炳九),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절의를 지켜 아포로 낙향한 이사경(李思敬)과 지례로 낙향한 장지도(張志道), 무신란 때 공을 세운 지례현 출신의 이상화(李尙化), 구성면 상좌원 출신의 독립 운동가 이석균(李鉐均),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해 감천면으로 낙향한 이선동(李善仝)과 이승원(李承元), 구성면 상원리 출신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이숙기(李淑琦),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지례로 낙향한 이존인(李存仁)과 개형현 출신의 이여량(李汝良), 병조판서로 여진족 정벌에 공을 세우고 양천동 하로로 낙향한 이호성(李好誠), 무신란에 창의하여 공을 세운 구성면 상원리 출신의 이홍적(李弘績), 봉산면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한 정유한(鄭維翰)과 정은신(鄭殷臣),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해 벼슬을 버리고 양천동 하로로 낙향한 최선문(崔善門), 어모면 다남리 출신의 독립 운동가 편강렬(片康烈), 조마면 장암 출신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허종(許琮) 등이 있다.
[관련 유적]
김천 지역 공신 관련 유적으로는 충신의 신위를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제실과 정려각, 서원, 기념비, 묘지 등이 있다. 봉산면 인의리에는 매계(梅溪) 조위[1454~1503]를 기리는 김천 율수재(律修齋)와 신도비가 있으며 양천동 하로마을에는 노촌(老村) 이약동[1416~1493]을 제향하는 하로서원과 신도비가 있다. 또 대항면 덕전리에는 박이룡[1533~1593] 장군의 신도비와 묘지가 있으며 구성면 광명리에는 의병장 여대로[1552~1592] 장군의 신도비가 있다. 배흥립[1546~1608]은 조마면 신안리에 정려각이 세워져 있으며 병자호란의 의병장 이언의는 감천면 도평리에 재실 영모재(永慕齋)와 애마비(愛馬碑)가 있다.
[의의와 평가]
김천에는 역사적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사심 없이 국정을 돌본 모범적인 관료가 많이 배출되었다. 또한 국가가 위난을 당했을 때 목숨을 던져 국가와 임금의 안위를 보존한 인물들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 충의 표상을 널리 선양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들이 오늘날 유적의 형태로 일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소리 없는 충신들의 흔적도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